마녀보다 매력적인 엄정화와 함께 한 20여 년

2014-05-27 13:03:36



엄정화, 오렌지족은 사라졌어도 그녀는 건재하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92년 엄정화는 유하 감독의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영화가 개봉하기에 앞서 청룡영화제에서 신인배우로는 이례적으로 영화의 삽입곡을 부르는 특별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다만 최민수, 홍학표와 함께한 이 영화는 흥행에서나 비평 면에서나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오렌지족 CF모델 혜진을 연기한 엄정화는 90년대 내내 배우와 가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에 성공한다. 그 후 KBS 드라마 <굿모닝, 영동>에서 오렌지족으로 출연했지만 사실 엄정화는 오렌지족의 발랄한 화려함을 대표하는 스타는 아니었다. 오히려 화장기 옅은 얼굴이나 인터뷰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90년대의 엄정화는 살짝 촌스럽고 투박했다. 스스로도 데뷔시절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강원도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다가 서울에 와서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촌닭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대에서의 엄정화는 달랐다. 그녀는 차갑고 서늘한 나이트클럽의 마녀 같은 인상이었다.

비록 첫 영화는 실패했지만 신해철이 만들어준 영화의 삽입곡이자 그녀의 첫 앨범 타이틀곡<눈동자>는 히트했다. 이후 90년대 내내 곳곳에서 들려온 엄정화의 빅 히트곡들은 특징이 있다. 사랑과 유혹 그리고 이별, 배신과 후회에 대한 드라마틱한 감수성이 나이트클럽에 어울리는 클럽음악의 빠른 비트 위에서 단막극처럼 펼쳐진다. 긴장감 있는 분위기로 시작해 여자의 비명소리로 끝나는 <배반의 장미>, 머리끄덩이잡기 싸움의 경쾌한 사운드트랙 같은 <삼자대면>과 한 편의 사랑과 전쟁 드라마가 연상되는 댄스곡 <포이즌>, 엄정화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인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하늘하늘하게 촉촉하게 젖어드는 <초대>, 독특한 귀마개와 사이버패션으로 피시통신 이모티콘(d-.-b)까지 탄생했던 <몰라>, 아직도 여름이면 해수욕장과 수영장에서 들려오는 발랄한 <페스티벌>까지.

물론 엄정화가 댄스곡을 부르면서도 시원시원한 가창력이 돋보이던 김현정처럼 보컬리스트로서 매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혹은 80년대의 댄싱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완선처럼 예인에 가까운 춤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정화의 장점은 남성 백댄서들과 더불어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녀의 마법처럼 자신의 무대를 스펙터클하고 매력적으로 만들 줄 안다는 점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 시절 엄정화는 두터운 팬층은 없지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독특한 아이콘으로 존재했다. 군인들에게는 위문공연의 섹시한 누나로, 게이들에게는 드라마틱한 클럽음악의 여왕으로 사랑받았다. 한편 노래방에 놀러간 젊은 여성들은 남자친구 앞에서는 달달한 <숨은 그림 찾기>를, 청승에 젖고 싶을 때는 <후애>나 <하늘만 허락한 사랑>을, 친구들끼리 우르르 몰려가서는 <다가라>를 ‘떼창’했다.

2천년대 들어 엄정화는 가수보다 배우활동에 치중한다. 유하 감독과 다시 손잡은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배우로서 그녀를 다시 보게 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서 엄정화는 무대에서 드러나는 팜므파탈 같은 면과 그녀의 소탈한 성격을 미묘하게 배합해 매력적인 캐릭터 연희를 만들어낸다. 이후 영화 <싱글즈>에서 당당한 커리어우먼 싱글여성 동미를 연기하면서 이후 엄정화의 대표적인 페르소나는 이쪽으로 굳어진다. 물론 드라마 <12월의 열대야>에서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가정주부 오영심을 연기해 멜로 히로인으로서도 썩 괜찮은 배우임을 증명했지만.

한편 2천년대 이후 가수로서의 그녀는 자신의 무대가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부린다. 2004년 발표한 8집 ‘Self Control’은 이런 엄정화의 욕심이 드러난 앨범이다. 두 장의 CD로 구성된 이 앨범에서 특히 Self 파트는 그녀가 좋아하는 일렉트로닉 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정재형이 작곡한 터프한 전자음이 매력적인 타이틀곡 ‘Eternity’는 물론이고 윤상과 함께한 ‘지금도 널 바라보며’나, 롤러코스터와 함께한 ‘Union of the Snake’ 같은 음악들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련됐다.



이 작업은 롤러코스터의 지누가 프로듀서를 맡고 인디신의 일렉트로닉 음악 아티스트들과 유명 작곡자들이 동시에 참여한 9집 ‘Prestige’까지 이어진다. 두 앨범은 비록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춤추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감상하기에도 좋은 매력적인 앨범임에는 틀림없다. 이후 YG의 양현석과 함께한 2008년 앨범 ‘D.I.S.C.O’와 히트곡 ‘D.I.S.C.O’에서 엄정화는 마흔이 된 나이에도 여전히 댄스가수로 건재했고 여전히 유니크하게 귀여웠다.

2014년 tvN 드라마 <마녀의 연애>에서 골드미스 기자 반지연을 연기하는 엄정화는 그런 점에서 다소 아쉽다. 이 드라마에 엄정화의 코믹연기나 감정연기는 여전히 자연스러움과 ‘오버스러움’의 경계를 적절히 넘나든다. 어쩌면 과거 그녀의 롤모델이었던 마돈나보다 엄정화가 훨씬 더 뛰어난 장점이 있다면 그건 드라마나 영화 내에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마녀의 연애>에서 엄정화의 연기는 대중들에게 다소 익숙해져 있던 것이기에 물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더구나 지금 이 순간의 <마녀의 연애>보다 과거 그녀가 보여주었던 마녀 같은 20여 년의 세월이 더 매력적인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엄정화의 사랑을 갈망하는 특유의 서글프고도 강렬한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 눈빛으로 진지한 모습을 보여줄 여유가 아직은 더 남아있다. 아슬아슬하고 아찔할 엄정화의 새로운 음악에 대한 기대감도 여전하다. 엄정화가 연기했던 압구정동 오렌지족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녀의 음악과 패션에 대한 테이스트는 세월에 상관없이 늘 신선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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