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제작비 180억이 전혀 아깝지 않은 ‘암살’의 미덕

2015-07-31 16:50:53



‘암살’, 김구 선생의 지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암살>은 세 명의 독립군이 1933년 경성에서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친일자본가를 암살하는 작전을 그린 액션영화이다. 물론 이 사건은 허구이다. 유사한 사건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1932년 일본 군부 내각의 등장으로 조선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어 1933년 경성에서 의열단이 암살 작전을 벌이는 건 시도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보면 마치 실제 있었던 사건을 보는 듯 생생한 느낌이 든다. 영화는 공들여 제작한 세트와 당시 만주와 상해를 배경으로 펼쳐졌던 독립운동에 대한 세세한 묘사로, 1930년대를 입체적으로 재현해낸다. 거기에 김구, 김원봉, 데라우치 총독 등 실존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안옥윤, 염석진, 강인구 등 허구의 인물들을 배치하여 역사적인 사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안긴다.

<암살>은 <범죄의 재구성><타짜><도둑들> 등을 통해 보았던 최동훈 감독의 실력 그대로, 놀라운 짜임새와 여러 인물들 간의 조화를 보여준다. 또한 제작사 ‘케이퍼 필름’의 영화답게, <암살>은 케이퍼 무비의 흐름을 따른다. 즉 ‘범죄 계획이 수립되고, 선수들이 모이고, 작전이 개시되고, 배신과 반전이 발생하는데, 그래서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누구?’ 라는 공식에 비교적 충실하다. 다만 결말 부분이 다소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보물을 훔치는 작전을 그린 영화의 결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물의 행방이다.

하지만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친일자본가를 암살하는 영화의 결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애초 작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와 관련이 있다. 의열단이 주도한 암살 작전의 목적은 의열단의 명칭이 유래된 공약 1조에 나와 있다.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하기 위함”이다. 즉 이 작전의 최종 목적물은 바로 ‘정의’이며, 영화의 결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의 행방’이다. 염석진의 최후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은 바로 ‘정의의 행방’을 보여주는 것이다.



◆ 민족주의를 벗어나 ‘먹고사니즘’?

<암살>은 놀라운 짜임새와 배우들의 매력을 통해 장르의 쾌감을 극대화한 영화인 동시에, 드물게 정의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다. 타짜와 도둑들의 세계를 그릴 때, 정의는 필요치 않다. 인물의 개성과 감정과 관계에 유의하여 상황윤리를 보여주면 그 뿐이다. <타짜>와 <도둑들>은 여기에 충실하였고, <타짜>는 짙은 페이소스까지 보여주었으니 명작이다.

그러나 독립군과 일본군과 친일파를 그릴 때, 선과 악에 대한 가치 판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을 선악의 구도에 놓는다면 왜 무엇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악의 고찰 없이 일본이니까 당연히 나쁘다고 하면 <도마 안중근>처럼 유치해지는 것이고, 친일의 문제에 있어서 선악을 논하기는 곤란하다고 하면 <청연>처럼 갈팡질팡하다가 뜨거운 감자를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게 된다.

<암살>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암살>에 대하여 단지 최동훈 감독의 특기를 잘 살린 ‘케이퍼 무비’라거나, 180억 원이라는 순제작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1930년대를 훌륭하게 재현한 시대극이라거나, 스타일리시한 촬영으로 고전영화의 풍미를 살려낸 호쾌한 액션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암살>은 올바른 역사관과 정의관으로 시대정신을 말하는 영화이다.



과거에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종종 만들어졌다. 독재정권시절에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영화들은 그 시절 만들어진 반공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선악구도를 지닌 채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이들 영화는 현실의 억압보다 더 강한 일제의 폭력을 그림으로써 군사독재를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억압으로 보이게 하고, 나라 잃은 설움을 강조하며 부국강병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군사독재는 끝났지만 과거청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일감정은 여전한 국민정서로 남아 있었고, 일제강점기를 그린 영화들은 이러한 반일정서에 기대어 민족주의적 울분이나 쾌감을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민족주의가 여전히 대세인 상태에서 일제강점기를 좀 다르게 그려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역도산>은 일본에 건너가 조선인으로 차별을 겪으며 일본의 영웅이 된 인물을 그렸다. 역도산은 “나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세계인”이라고 말했지만, 영화 스스로 민족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떨어버리지 못한 태도를 보이면서 애매한 느낌을 자아냈다.

<청연>은 더 큰 실패를 보여준다. 영화는 행군하는 일본군을 보고 “닌자의 비상”을 떠올렸다는 발칙한 소녀의 내래이션으로 출발한다. 이 말도 극단적인 반편향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 소녀가 점령군으로 입성한 외국군대의 행진을 보며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상상이다. 영화는 이러한 무리를 동원해서라도 봉건적인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 일제가 선사한 근대성을 기회로 삼아 자아실현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영화 <청연>은 박경원의 ‘친일부역’에 대해 명쾌한 입장을 제시하지 못한 채, 변명을 해대느라 뜬금없는 고문장면과 엉뚱한 신파를 동원하였다. 그 결과 본래 의도하였던 신여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영화는 ‘일만친선 황국위문 일만연락비행’에 나서는 박경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죽음으로 봉합해 버린다. 영화는 박경원의 행위를 당시 신여성의 자아실현으로 볼 것이냐 친일로 볼 것이냐는 잘못된 의제설정에 묶여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패착이 있다. 당시 신여성의 자아실현은 친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큰 질문을 놓친 것이고, 박경원의 비행이 조선 안에서의 친일을 넘어 일제의 만주침략을 지지하는 국제적인 전범행위라는 점을 놓친 것이다. 이는 더 큰 가치에 대한 고민 없이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은 친일-항일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영화의 서사를 끌고 나가는 주인공이자, 최종적으로 보물을 얻는 승자인 ‘이상한 놈’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본 놈 밑에 있나, 양반 놈 밑에 있나 그게 그거”라고 말하며 땅을 사서 가축을 기르며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냈다. 영화는 그의 ‘먹고사니즘’을 추인하며, 아편굴에서 ‘민족의 기상’ 운운하는 독립군의 말을 헛소리로 처리해버린다. 즉 <놈놈놈>은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비웃으면서, ‘먹고사니즘’을 표방한다.

<놈놈놈>이 개봉되었던 2008년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에서 먹고사니즘은 그 어떠한 이념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인정되었다. <의형제>를 비롯해 남북의 이데올로기보다 먹고사니즘을 강조한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졌으며, 부도덕하고 천박한 집단이지만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정당이 잇달아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 민족이 아닌 정의의 이름이라 더 의미 있는 저항

영화 <암살>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일제와 싸우고, 정의를 위해 친일파를 처단하는 사람들을 통해 민족주의와 먹고사니즘을 넘어서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보여준다. <암살>에도 먹고사니즘을 표방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독립운동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라는 ‘속사포’나 돈만 주면 누구든 죽여주는 ‘하와이 피스톨’과 영감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자긍심이나, “거세당한 돼지로 살 수 없다”는 자각에 의해 초심을 회복하고 투쟁에 나선다. 먹고사니즘을 이기는 인간의 존엄을 말하는 것이다.

안옥윤이 독립군이 된 것은 1920년 만주참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일본군은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는 학살자이다. 일제가 나쁜 것은 일본이어서가 아니라 반인륜적이고 파시스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성은 자신에게 실수한 소녀를 쏴 죽이는 일본군 장교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300명의 조선인을 죽였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가 소녀를 죽이며 한 말은 “왜 줄에서 이탈하냐?”이다. 이는 일제의 잔혹성이 전체주의적 규율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엄숙한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을 통해 일제의 전체주의를 재삼 환기시킨다.



영화는 폭력적인 일제에 맞서 대항폭력을 행사하는 의열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폭력투쟁이었던 3.1운동의 실패를 딛고 결성된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를 통해 조선민중을 각성시킨다는 노선을 채택하였다. 일제에게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로 취급받던 김원봉에게 한 요원이 묻는다. “일본인 민간인을 희생시켜도 됩니까?” 김원봉은 “모든 민간인들은 죽여서는 안 된다”고 답한다. 실제로 의열단은 암살대상을 조선총독부 고관, 일본군 수뇌,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대지주 등으로 제한하였다. 제국의 지배자와 친일부역자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지 일본인과의 싸움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영화는 조선독립을 지지하여 아네모네 마담의 독립운동을 10년째 돕고 있는 일본인의 존재를 보여준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는 조선독립을 지지하여 한국인 남성 박열과 함께 폭탄의거를 계획한 가네코 후미코 같은 아나키스트가 존재했다. 이렇듯 항일투쟁은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의 싸움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간의 존엄과 세계 평화를 지키려는 인류사적인 저항운동이었다.



◆ ‘식민지 여성’이라는 자각이 계몽된 여성주체에게 각인될 때

영화는 안옥윤, 아네모네 마담, 안옥윤의 엄마 등 여성독립운동가의 존재를 보여준다. 여성독립운동가라는 존재는 여성과 근대와 민족이 만나는 지점을 새롭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와 여성의 접점에서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희생자인 위안부와 서구소비문화의 첨병인 신여성이다. 그러나 여성이 근대를 받아들일 때, 근대성의 핵심인 국가가 빠질 수 없다. 봉건적 질서 하의 여성은 직접 국가와 대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되고자 할 때 국가는 여성을 이등국민으로 소환한다. 식민지 여성에게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 없음’이 이들의 주체형성에 관여한다.

즉 ‘식민지 여성’이라는 자각이 계몽된 여성주체에게 각인된다. 그 결과 신여성 중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지만, 역사에서 잊혀졌다. 봉건질서가 여전히 남아 있던 3.1운동 당시, 유관순으로 대표되는 여학생들의 참여가 높았던 것은 이례적이다. <암살>은 안옥윤을 통해 박차정, 남자현, 권기옥 등 당시 실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들의 존재는 신여성으로서의 자아실현이 친일로 귀결되었다는 <청연>의 문제의식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암살>은 1인 2역을 통해 부르주아 신여성 미츠코의 삶과 여성독립운동가 안옥윤의 삶을 대비시킨다. 미츠코는 “나도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좋아해. 그런데 넌 안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미츠코는 친일자본가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 말하며, “경성에선 다 이렇게(친일을 하며) 살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나이브한 인식은 곧 죽음으로 돌아온다. “좋은 사람” 강인국은 출세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해 가차 없이 딸을 죽인다. 친일매국노라도 좋은 아버지일 수 있다는 명제가 얼마나 일면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강인국은 자신의 친일행위가 가족을 위한 일이자 가난한 조선을 잘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아내와 딸을 죽이는 강인국의 모습은 그의 경제개발의 논리가 결국 조선인들을 모두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미츠코로 가장해 미츠코의 집에 들어 온 안옥윤은 웨딩드레스를 보고 와락 눈물을 삼킨다. 총을 들고 생사를 넘나들던 안옥윤이 웨딩드레스를 보고 가장 끔찍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흐느끼는 장면을 어찌 보아야 할까. 계몽된 주체인 안옥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일은 부르주아 여성이 되어 일본장교와의 정략결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근대화를 생각하면서 신여성들이 국가와의 대면을 회피한 채, 단지 부르주아 여성으로 소비의 주체가 되기를 선망했다고 오인하는 것이 여성 폄하적인 사고였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 정의의 이름으로 친일부역자들을 심판해야 한다

영화는 염석진을 통해 친일파들의 논리를 잘 보여준다. 1911년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뒤 살려주는 대가로 밀정이 된다. 임시정부에 투입되어 정보를 빼돌리다가 의심을 받자 경성에 돌아와 일본 경찰이 된다.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경찰간부로 일한다. 변절자 염석진은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다고”. 인간은 누구나 비겁한 존재이며, 그러니 특별한 척 하지 말고 더 센 힘에 굴복해서 사는 것이 맞다고. 그것이 자신의 변절에 대한 그의 변명이다. 그는 “물지 못할 거면 짖지도 말라”며 독립을 위한 투쟁을 무의미한 것으로 폄하한다. 그러나 사람은 다 똑같지 않다. 안옥윤은 왜 이런 불가능한 싸움을 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었음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염석진은 힘의 논리를 따르고, 안옥윤은 정의의 논리를 따른다. 염석진은 결과를 중시하고, 안옥윤은 과정을 중시한다.

염석진은 반민특위에 고발당하지만, 유창한 달변으로 빠져나온다. 영화는 해방에 환호하는 군중의 얼굴을 그대로 반민특위 방청객의 흥분으로 이어간다. 이것은 당시의 국민들이 친일파 청산에 냉철하게 대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염석진은 억울한 듯 토해낸다. “조선이 독립할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1949년 반민특위는 친일 청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안옥윤은 염석진을 사살한다. 안옥윤은 왜 굳이 염석진을 죽여야만 했을까. 이것은 단지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대중적인 마무리일까. 그렇지 않다. 영화는 반민특위가 놓친 친일청산을 안옥윤이 조금이나마 진전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 명령, 82년 만에 집행합니다.” 이제라도 친일부역자들을 심판해야 한다. 민족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정의의 이름으로!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과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말로 ‘정의’란 단어가 오염된 후, 세일러 문(“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어”) 이외에는 아무도 ‘정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 뒤늦게나마 안두희를 때려죽인 몽둥이에 쓰인 문구가 ‘정의봉’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011년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2012년 정의당이란 이름이 재등장한 것은 징후적이다. 이제 먹고사니즘이 아닌 정의에 대해 말할 때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암살><청연><놈놈놈>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목록으로

집중분석

더보기

더보기

많이본칼럼

더보기
[첫화면] [PC버전]
enter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