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에게 ‘앨리스’ 추천한 박찬욱의 선택은 옳았다

2015-09-01 11:37:56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성실이 너희를 실성케 하리라!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천만 관객의 한국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온 올 여름 극장가에서, 독립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4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영화시장의 양극화로 인해, 상업영화계가 천만 관객을 논할 때, 독립영화계에서는 1만 명의 관객을 모으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신인감독이 2억 원의 제작비로 만든 영화가 많지 않은 상영관에서 4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개봉 전 전주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배우 이정현의 재발견으로 화제를 모았다.

◆ 이정현과 박찬욱과 안국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정현을 원 톱으로 내세운 영화다. 이정현은 1999년 강렬한 테크노 리듬에 독창적인 퍼포먼스로 <와> <바꿔> 등을 히트시키며, 세기말의 정서를 담아낸 가수로 기억되곤 하지만, 원래 배우였다. 1996년 장선우 감독의 <꽃잎>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와중에서 가족을 잃고 미쳐버린 소녀의 역할을 맡아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었다. 가수 데뷔 후 몇몇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하였으며, 일본과 중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최근의 활동은 영화 <명량>에서 말 못하는 아낙으로 나와, 절박한 표정으로 치마폭을 흔들며 아군의 전멸을 막는 모습이었다.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이정현이라는 배우의 내공을 각인시킨 연기였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정현이 주연을 맡지 않았다면, 의미가 전달되기 힘들었을 영화이다. 영화가 품은 부조리극의 정서가 이정현이라는 육체가 지닌 불가사의함을 통해 극대화된다. 즉 여리고 가냘픈 체구에서 품어져 나오는 집중된 힘이나 순간순간 비치는 광기, 혹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앳된 얼굴에 서린 기이한 회한 등이 영화의 부조리함을 온전히 전달한다.

안국진 감독 역시 영화를 구상하면서 이정현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정현의 소속사에게 거절을 받았는데, 마침 시나리오를 읽은 박찬욱 감독이 이정현에게 직접 시나리오를 전달하며 강력 추천해 캐스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감상이지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박찬욱 감독의 초기 스타일을 무척 닮아 있다.



잔혹극이면서 상황에서 한 발 떨어져 블랙코미디를 구사하는 점이나, 평면적인 화면구성으로 낯설게 보이는 효과 등은 박찬욱 감독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킨다. 심지어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가 죽이는 거 이해해요.”라는 이정현의 대사는 “나 너 착한 놈인 것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것 이해하지?” 라는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의 대사와 겹치는데, 일종의 오마주라고 볼 수 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잔혹극의 장르를 취하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일종의 사회극이란 점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틀을 벗어난다. 박찬욱 감독이 초기 스타일을 잃고 점차 화려한 장르와 서양고전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 흐릿해져갔다.

그러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국사회의 노동현실과 부동산 문제를 잔혹극의 장르 안에 비릿한 피 냄새와 가난의 땟국물을 살려 담아 놓았다. 그 결과 박찬욱 감독이 찍지 못한 영화를 안국진이라는 걸출한 신인 감독이 찍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안국진 감독은 TV <생활의 달인>을 보며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생활의 ‘달인’이 되도록 일해도 노동자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으며, ‘달인’의 경지에 올라도 노동계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진실을 담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 ‘성실한 나라’와 자기계발의 윤리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란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두 작품은 전혀 관계가 없다. 하지만 참 절묘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판타지 동화의 제목을 차용해 일종의 부조리극이란 인상을 강하게 주면서, 뒤바뀐 단어 ‘성실한’에 무게가 실린다. 실제로 영화는 ‘성실함’이란 무엇이고, 그것의 모순과 한계는 무엇인지 보여준다. 또한 성실함을 윤리이자 강령으로 제시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거기서 벌어질 수 있는 참극은 무엇인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수남(이정현)은 중학교 졸업반 때 ‘엘리트’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등학교에 진학해 주산, 부기 등 자격증을 14개나 딴다. 하지만 곧 컴퓨터에 의해서 그런 자격증이 전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후 작은 공장에서 경리일을 하며 힘겨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러한 서사는 서글픔과 함께 웃음을 동반한다. 고작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것과 엘리트가 되는 것은 거리가 멀지 않은가. 하지만 수남은 진지하다. 진지하게 꿈을 꾸고, 진지하게 노력한다. 수남은 그가 속한 노동계급에서 전체 사회에 대한 조망 없이 지나치게 성실하게 산 사람이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손으로 하는 일’과 ‘희망을 품는 일’이다.



수남은 장애나 사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쏟을 만큼 지고지순하다. 장애가 있는 남편을 사랑했고, 돈을 아끼지 않고 수술시켰으며, 사고로 실의에 빠진 남편에게 집을 사주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계속 “나만 열심히 하면 돼” “잠은 나중에 잘 수 있어” “일을 늘려야 돼” 라고 말하며 9년간 투 잡, 쓰리 잡을 뛰었다. 그는 과연 ‘생활의 달인’이자 ‘희망의 달인’이다. 자격증을 따면 엘리트가 되리라 믿고 자격증을 땄으며, 수술을 받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고 남편을 수술시켰다. 또 집만 사면 남편과의 행복한 삶을 얻을 거라 믿고 집을 샀다.

그러나 수남이 꿈꾸었던 삶은 수남에게 오지 않았다. 수남은 빚을 잔뜩 떠안은 하우스 푸어가 되어,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살면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간병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수남은 여전히 병원비만 해결하면 남편이 곧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남편과의 사랑, 성실한 노동, 일에 대한 숙련, 잘 될 거라는 희망. 이것은 그동안 우리사회가 강조한 가치와 미덕들이다. 자기 계발서의 윤리도 결국은 이와 같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하여 내가 속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 수남은 정말로 그것을 가장 급진적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그런데 성실의 귀결은 바로 실성, 즉 광기이다. 수남은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자신의 꿈을 저해하는 자들을 제거한다. 성실하게 익혀 온 숙련된 노동을 통해서! 성실한 노동으로 차곡차곡 돈을 모아 행복해 질 수 없는 나라에서, 수남은 결국 성실하게 익힌 그 기술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여 행복해지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피칠갑이다.



◆ 집착과 광기 그리고 <감자>

꾸준히 일한만큼 꾸준히 집값도 꾸준히 오르던 ‘성실한 나라’에서, 대출로 집을 사서 하우스 푸어가 된 수남에게 그동안 쏟아 부은 노력을 한 몫에 보상받을 기회가 온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로또. 그런데 재개발로 인한 집값 상승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불노소득이다. 또한 수남 같은 노동계급이 집을 살 수 없게 만들었던 원흉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남에게 그러한 큰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돌려받지 못한 수남의 욕망은 반동적으로 작동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특별한 점은 노동계급으로 수난을 당해온 주인공의 복수극을 그리면서, 그를 철거민의 위치가 아니라 재개발을 둘러싸고 이권투쟁을 벌이는 집주인의 위치에 놓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수남의 시선으로 수남의 집 세입자의 가족사진을 비춘다. 세입자가 아기를 낳고 알콩달콩 사는 모습에 수남은 부러움을 느꼈을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남은 벽에 못을 많이 박았다는 타박을 하며, 전세금을 올려 달라 말한다. 하층노동자 수남은 세입자에게만은 ‘사모님’ 소리를 듣는다. 노동계급이자 하우스푸어인 수남의 이해관계는 모순적이다. 그래서 그의 욕망은 분열적이며, 자기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반드시 재개발을 성사시켜야 하는 절박한 상태에 내몰려,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제거한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고, 두 번째는 방어적이었지만, 세 번째는 계획 살인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재개발 그거 내가 그만 두게 할 수도 있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서였고, 다섯 번째는 그 자리에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어서였다. 수남은 살인을 하고 어린아이처럼 짜증스럽게 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수남에 의해 제거된 동네사람들도 재개발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같은 욕망을 지닌 채, 각자의 욕망을 경쟁 중이다. 어디 욕망뿐이겠는가. 불행과 불안도 함께 경쟁 중이다. 박스를 모으는 독거 가스통 할배나, 분노조절 장애를 앓으며 치매노인을 모시고 사는 노총각 세탁소 사장이 수남보다 덜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수남의 성실, 절망, 분노, 집착, 광기는 어쩌면 보편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곳 ‘성실한 나라’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고, 다들 그렇게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닐까.

에르코 쉬르데주의 한국문화 체험서 <한국인은 미쳤다!>를 보면, 한국사회가 얼마나 맹목적인 성실함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실함이 어떤 보상을 받을까. 2014년 김낙년 교수의 논문 ‘한국의 개인 소득 분포 : 소득세 자료에 의한 접근’에 의하면, 한국의 개인소득자 3천 122만 명 중 48%는 1년에 천만 원을 벌지 못한다. 이러한 분석은 ‘성실한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노동계급이 처한 빈곤상황을 잘 말해준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경선에 나선 버니 샌더스는 "주 40시간 일하는 사람이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연설로 호응을 얻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을 보면,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고도 부모에게 용돈도 주지 못하고 아이들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눈물짓는 여성노동자들이 나온다. ‘성실한 나라’ 대한민국의 수많은 앨리스들은 지금 자신의 숙련노동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쓰기 직전에 내몰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1925년 김동인의 소설 <감자>는 평범한 여인 복녀가 남편의 무능과 가난으로 인해 도덕적 금기를 넘어서고, 마침내 질투와 집착으로 낫을 빼어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성실하게 살아가던 여성이 남편의 변고와 가난, 그리고 집착으로 인해 칼을 빼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가 1919년 김동인의 소설 <약한 자의 슬픔>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녔던 것을 상기해보면, 오늘날의 계급문제가 90년 전과 비슷한 양태를 지니는 점에 자못 놀라게 된다. 어쩌면 지금부터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대가 다시 열리는 것은 아닐까. 카프(KAPF) 문학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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