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차왕 엄복동’, 국뽕과 신파를 논할 자격조차 의심스럽다

2019-02-21 16:43:53



‘자전차왕 엄복동’, 형편없는 영화를 만든 건 죄가 아니지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언론시사회가 끝난 뒤 있었던 간담회에서 김유성 감독은 “국뽕과 신파 의혹과 혐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렇다면 국뽕이 무엇이고 신파가 무엇인지, 왜 국뽕과 신파는 지양되어야 하는 것인지 이참에 이야깃거리가 되어서 영화가 관람에 그치거나 소비되지 않고 많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게 굳이 논의까지 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 원하신다면.

일단 ‘국뽕’이란 무엇인가.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로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도취된 태도를 가리킨다. 처음부터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이고 그 동안 의미는 바뀌지 않았다. 이 정의에 맞는 태도라면 옹호할 건더기가 없다. 하지만 욕이란 것은 과장이 따라가기 마련이니, 실제로는 보다 온건하거나 정상적인 태도를 국뽕이라고 몰아갈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여전히 국뽕은 왜 지양되어야 하는가란 질문은 무의미한 것 같지만, 개별 영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석해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어떤 영화인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엄복동이라는 실존 자전거 선수가 주인공이다.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백 년 전엔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 선수들을 누르고 승리를 거듭하는 조선 선수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전기적 자료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고, 은퇴 이후 범죄 경력도 만만치 않지만 이야기꾼에겐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미 1980년대에 MBC에서 <자전거왕 엄복동>이라는 특집극이 만들어진 적 있다. 본 적은 없지만 영화보다 전기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 엄복동은 일제시대 자전거 선수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실존인물과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엄복동의 업적을 부풀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엄복동은 자전거를 잘 탔다. 당시 조선 민중에겐 영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허구의 힘을 빌려서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데, 그래도 상한선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영화는 정반대로 간다. 일단 영화 속 엄복동은 신기할 정도로 매력이 없다. 어쩌다가 민족의 영웅이 된 평범하고 순박한 남자를 의도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 순박한 남자가 매력이 없는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엄복동은 주변의 조건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근육으로 만들어진 기계처럼 존재한다. 내면이 없으니 당연히 고민도 없다. 관심이 안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신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은 이 고민 없는 남자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과장한다. 단지 자전거를 잘 타서 조선 민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것을 넘어서, ‘민중의 저력’에 힘을 불어넣어 3.1. 운동과 같은 적극적인 저항에 힘을 실어준 인물로 그리는 것이다. 엄복동이 참가한 자전거 경주 역시 더 이상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선악 대결이다. 막판에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일본 선수는 심지어 엄복동의 동생을 살해한 원수다. 엄복동은 끝까지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굳이 왜 이 설정을 깔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엄복동에 자극받은 조선 민중이 애국가를 부르며 일본군의 총칼 앞에 뛰어드는 장면을 찍는 동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국뽕 이외의 다른 단어를 쓸 생각 역시 전혀 들지 않고.



자, 이번엔 신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어원만 따지면 좀 괴상하게 쓰이는 단어다. 신파란 말 그대로 뉴웨이브니까. 신파극은 일본의 연극 사조로 가부키와 같은 전통 연극에 대립하는 신극을 가리키는데 이게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당시의 새로운 유행은 지금 보면 통속적이고 억지스럽고 구닥다리처럼 보인다. 지금 신파는 이 낡은 속성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자전차왕 엄복동>에서 신파는 남용된다. 그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흥분한 스포츠팬들을 총칼 앞에 던지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한다. 관객들을 민족적 울분과 억울함으로 울컥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영화는 고민이나 계산 없이 빈 공간에 아무 거나 막 집어넣는다. 기관총과 수류탄, 시한폭탄으로 무장한 애국단이 매국노와 일본인을 처단하는 액션 장면은 시작에 불과하다.



영화는 이 액션 파트의 주인공인 행동대원 김형신을 엄복동과 억지로 엮는다. 로맨스가 싹틀 시간도 없지만 일단 감정이 있다고 치고 이를 과장한다. 여기에 억울하게 죽은 동생, 피투성이 고문을 당하는 애국단과 주인공, 지금까지 공부 잘 하는 동생과 비교하며 구박했던 아들이 갑자기 유명해지자 마음이 확 바뀌어 상경해 울먹이는 아버지, 오로지 관객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하는 악역 등등이 등장한다. 스포츠팬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총칼을 향해 달려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이 리스트는 한 없이 길어질 수 있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못 만든 영화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죄가 아니다. 우리의 능력은 이상을 따라잡지 못하고,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는 찍고 붙여보기 전엔 모른다. 이들이 애국적인 영화를 만들려했다는 것도 죄는 아닐 것이다. 애국적인 정서에 기반을 둔 훌륭한 영화들이 이미 있으니까. <자전차왕 엄복동>에게 죄가 있다면 형편없는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어놓고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이에 대한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는 데에 있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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