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30대 여성들이 새로운 담론 주체로 등장했다는 건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

- 뮤리엘 루카이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벌새>는 신인 여성감독 김보라의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등 25개의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국내에는 서울독립영화제와 부산영화제 등에서 먼저 관객을 만났고, 입소문에 힘입어 마침내 개봉하였다. 소규모 개봉임에도 4만 명의 관객을 모을 만큼 나름 흥행하고 있다.



◆ 여중생의 부유하는 내면

<벌새>는 김보라 감독이 10년 전 만든 단편 <리코더 시험>의 문제의식을 장편으로 확장한 영화이다. <리코더 시험>은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을 배경으로, 초등학생인 은희가 느끼는 결핍된 일상을 비춘 짠한 성장영화였다. <벌새>는 단편의 인물과 가족관계를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1994년으로 옮겨놓았다. 중학생인 은희(박지후)의 일상을 통해 불안과 상실이 일렁이는 청소년의 내면을 담은 단단한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는 1990년대 강남구 대치동의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은희의 가족을 비춘다. 떡집을 운영하는 은희의 부모는 생계노동에 바쁘다. 명절 등 대목이면 온가족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손을 돕고 저녁이면 둘러앉아 돈을 셀 만큼 장사는 잘되는 편이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유복하거나 화목한 가정은 아니다. 아버지는 적당히 권위적인데다 살짝 바람이 나있다. 엄마는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살만큼 피곤에 절어있다.



언니는 ‘공부를 못해서’ 강북의 고등학교를 다니는 ‘불량 소녀’이다. 집에 안 들어오거나 남자친구를 방에 몰래 들이기도 하는 언니는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집안 망신시킨다.’며 얻어맞는다. 한 살 위의 오빠는 공부를 잘한다. 장남을 서울대를 보내겠다는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특목고를 준비 중이다. 자신을 작은 가부장으로 여기는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은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문제아도 아니고 우등생도 아닌 은희는 부모와 교사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는 적당한 방임상태에 놓여있는 은희의 인간관계와 내면의 물결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화 <벌새>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 기대고 있지만, 기묘하게 낯익은 기시감을 불러낸다. 어쩌면 집단의 기억 속에 숨죽이고 있던 미시사적인 편린들이 꿈처럼 펼쳐진다. 영화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소녀의 부유하는 성장기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 오롯한 자존의 감각이 숨어있다.



◆ 뜻밖의 관계에서 얻게 되는 자존감

영화는 은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각에 주목한다. 은희는 친밀한 관계에서 자존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외부의 우연한 관계를 통해 자존감이 충족된다. ‘대드는’ 은희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생각하는 오빠는 은희를 때린다. 부모에게 오빠의 폭력을 고발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저 “싸우지 말라” 말할 뿐이다. 아버지 앞에서 오빠가 은희를 때리자, “어디 부모 앞에서 동생을 때리냐?”며 놀란다. 여기서 아버지가 경악한 지점은 동생을 때린 폭력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서울대 가는 것’ 만을 지상 목표로 삼는 학교가 ‘날라리’를 적어내게 하자, 또래 그룹에 속하지 못한 은희가 지목된다. 그래도 은희에겐 단짝 친구와 남자 친구도 있다. 하지만 단짝 친구는 위기에 몰렸을 때 은희를 더욱 심한 위기에 몰아넣어 배신감을 안긴다. 문구점 에피소드의 결말은 은희가 부모의 무관심을 처절하게 재확인한 것이었다. 은희는 남자친구와 어설픈 스킨십도 나눈다. 하지만 이후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애에게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마마보이처럼 엄마 손에 끌려가는 한심함을 보인다. 이들과의 관계에서 은희는 온전한 자존감을 느끼지 못한다.



은희가 자존감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은 가정, 학교, 단짝친구, 남자친구 등 흔히 소녀의 삶을 재구성할 때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왔던 규범적 관계 바깥에서 만나게 된다. 한문학원의 영지 선생은 단짝친구와 다투고 엉망이 되어버린 은희에게 차분한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부당한 폭력에 맞서야 한다는 단호한 말을 들려준다. 은희는 영지 선생을 통해 단단한 자아를 지닌 어른의 모습을 처음으로 접한다.

한편 은희에게 동성애적인 매력을 느낀 후배로 인해 은희는 색다른 감정을 경험한다. 영화는 이성애적인 감정과 동성애적인 감정을 동등하게 다룬다. 정상과 비정상, 우월함과 열등함, 보편과 특수로 나누어 다루지 않는다. 후배와의 감정은 우정이 아닌 연애의 감정이기에, 싸우고 화해가 가능한 단짝친구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설레는 시작과 식어버리는 끝이 있어서, 후배는 한학기가 지나자 더 이상 은희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이 유지되는 동안 은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충만감을 느꼈을 것이다.

은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안 사람들은 보호자가 없는 은희를 대견하다고 칭찬한다. 칭찬을 받아오지 못한 그는 낯설지만 집이나 학교에서 느끼지 못한 위안을 병원에서 얻는다. 또한 은희와 신뢰를 쌓은 늙은 의사는 은희가 고막을 다쳐오자, 진단서를 끊어주겠다고 말한다. 짧은 대화이지만, 은희가 당한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저항해야 된다는 사실과 사회가 은희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건네는 따뜻한 말이다.



◆ ‘1990년대 강남’에서 유년을 보낸 세대

영화 <벌새>는 절묘한 세대적·젠더적 주체성을 드러낸다. 영화는 1994년 강남이라는 시공간을 완성도 높게 재현하며, 강력한 세대적 무의식을 소환한다. 그리고 소녀를 1인칭으로 삼은 여성주체의 성장담이라는 측면에서 뚜렷한 젠더성을 지닌다.

1994년 강남의 복도식 아파트, 김일성의 사망,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는 그 시절을 유년의 기억으로 간직한 세대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영화의 시공간은 ‘응답하라’ 시리즈가 안겼던 추억여행과는 다른 질감을 안긴다. 즉 영화가 비추는 ‘1994년 강남’이라는 시공간은 향수가 아닌 성찰의 단서가 된다. ‘그립고 정겨운 그 시절’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치통처럼 떠오르는 아린 기억’인 셈이다. 영화는 시공간을 소품이나 배경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담고 있던 역사적 맥락과 상흔을 복기한다.

영화 속 1994년 강남의 시공간은 자본주의적 물신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교실에서 엎드려 자는 은희에게 “쟤는 나중에 우리 집에서 가정부나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애들이나, “시험 잘 보면 부모가 메이커 옷을 사준다.”는 단짝친구의 말, “쟤가 떡집 하는 애냐?”라며 대놓고 무시하던 남자친구네 엄마의 말은 이러한 물신성을 잘 보여준다. 살벌한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재개발 지역의 황폐한 풍광과 어느 날 뚝 상판이 떨어져버린 성수대교의 모습은 개발과 단절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세대, 젠더, 새로운 주체의 출현

이러한 단절과 결핍 속에서 영지 선생은 인간의 태도를 보여준다. 제 땅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함부로 동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투탁 대는 아이들 앞에서 “잘린 손가락” 노래를 들려준다. 그는 1980년대 학생운동이 잦아든 뒤 나왔던 1990년대 후일담 문학의 정서를 풍기지만, 그보다 오롯한 주체성과 내면을 지닌 존재로 다가온다.

이처럼 단단하고 서늘한 여성 캐릭터는 흔치 않았다. 그것은 대다수의 영화들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영지 선생역을 맡은 배우 김새벽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문소리는 1999년 영화 <박하사탕>로 데뷔했다. <박하사탕>의 순임은 시대적 굴곡을 겪는 남성주체 영호의 눈에 비친 순수한 여성이자 그의 마음속에 박제된 이상향이었다. 그는 자기 서사와 내면을 지니지 못하고, 갈등하고 파멸하는 남성주체의 내면의 결핍을 채우는 대상화된 존재였다. 그러나 영지 선생은 남자의 시선을 경유하지 않은 채 스스로 존재하는 인격체로, 자신의 역사와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단단한 인격으로 은희에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는다.



영화는 오롯한 단독자의 위엄을 갖춘 성인 여성이 불안과 혼돈을 겪는 소녀에게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가도록 북돋워주는 이야기를 담은 저릿한 여성서사이다. 다행히 재난을 비껴갔으나 불안감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던 저녁식탁의 불길함은 결말의 복선이 된다. 가족을 비껴간 재난을 누군가는 피할 수 없었고, 그 상흔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은희는 자신이 겪은 상실을 엄마를 비롯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가장 철없는 존재처럼 보였던 세 명의 청소년들이 이른 새벽 성수대교 아래로 달려가 묵념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어른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다시금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영위하던 그 재난 앞에서 어린 학생들만이 제대로 된 애도를 표한다. 이후 은희는 상실의 아픔을 딛고,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하는 법을 익히며 살게 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영지 선생이 끓여주던 우롱차를 떠올리며 힘을 얻었을 것이다.



영화가 지닌 세대론적이고 젠더론적인 함의는 꽤 묵직하다. 1980년대 태어난 여성 감독이 지극히 개인적인 유년의 기억을 콘텐츠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주체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박하사탕>부터 <친구>와 <부당거래>를 거쳐 <1987>에 이르기까지, 근 20년 동안 거대서사는 물론이고 미시사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386 남성 주체’들의 기억과 발화가 중심을 차지해왔다. 수많은 느와르 물과 뜨거운 정의를 부르짖는 시대물들, 그리고 온갖 내 마음 속의 ‘순임이’를 찾거나 여성신체를 난자해왔던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미투 혁명’과 ‘조국 사태’에서 드러나듯, ‘386 남성주체’들의 정치적·윤리적 정당성은 파산 위기를 맞았다. 이들의 위선과 반동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담론을 펼칠 주체의 출현이 요구된다.

그것은 이미 도착해있다. ‘82년생 김지영’들, 즉 ‘30대 여성주체’들이 새로운 담론 주체로 이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벌새>는 30대 여성주체가 오빠와 다른 기대를 받으며 살아왔던 미묘한 차별의 기억부터 이성애보다 동성애가 더 자연스럽고 농밀하게 다가왔던 사춘기의 경험들이나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하기 이전에 ‘나에게 힘이 되었던’ 멋진 여성 롤 모델의 존재를 기억 속에서 발굴해낸 작품이다. 앞으로 이런 작품들이 더 만들어진다면, ‘386 남성주체’의 기억을 보편 서사인양 향유하던 담론의 장이 엄청난 지각변동을 맞을 것이다.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 라는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벌새>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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