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예능이 사라진 추석 연휴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파일럿 예능이 사라졌다. 이번 추석 연휴 TV편성표에는 지난 10여 년간 명절 연휴마다 이어지던 파일럿 예능의 바람이 멎었다. <괴팍한5형제>, <고스톱>, <막 나가는 뉴스쇼> 등 3편의 파일럿을 편성하며 물량공세에 나선 JTBC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파일럿 예능 자체가 없었다. 특히 파일럿 물량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지상파 예능국이 잠잠했다. 연휴도 짧은데다 각사의 대표 예능이 대거 포진한 주말을 낀 탓도 있지만, 예전 같으면 파일럿을 내세웠을 자리에 사실상 재방송인 하이라이트 편집 방송의 편성은 분명 의미하는 바가 있다.

게다가 마침, 2009년부터 11년째 찾아온 <아육대>도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다. 악화된 방송사의 경영 사정과 새로울 것 없는 고착화된 예능 패러다임, 점점 생애주기가 짧아지는 시즌제 스타일의 편성과 약화된 TV의 매체 경쟁력 등 복합적 영향이 만들어낸 새로운 흐름으로 해석된다. 그런 탓에 새로운 예능을 찾아보는 재미나 기대와 같은 명절 연휴에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을 이번만큼은 만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반응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KBS2에서 유일하게 준비한 <부르면 복이와요 달리는 노래방>는 7%대 중반으로 파일럿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특별한 의미를 찾긴 힘들었다. TV조선 <미스트롯>의 향기와 함께 행사 스타일의 진행이란 고유한 영역을 마련한 붐의 에너지와 캐릭터에 많은 부분을 기댄 전형적인 명절 특집용 기획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역 특산물 홍보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선한 영향력을 내세운 SBS의 <맛남의 광장>은 그나마 안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가능성을 내비쳤다. <푸드트럭>과 <골목식당>의 뒤를 잇는 또 한편의 백종원 식문화 개선 프로젝트로서, 지역 특산품을 이용해 신메뉴를 개발하고 이를 휴게소나 공항, 철도역 등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에서 연예인 출연자들이 생산과 판매를 하는 백종원 브랜드 특유의 예능이다. 선한 기획의도와 믿을만한 콘텐츠가 조화를 이루는 백종원 예능은 언제나 믿을 만 하지만 <골목식당>과 그 의도와 접근법이 일정 부분 겹친다는 점에서 굳이 파일럿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는 신선도가 아쉽다.



다른 방송사와 달리 넉넉한 물량을 준비한 JTBC의 파일럿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컸던 프로그램은 연휴 마지막날인 일요일 밤 10시 20분에 편성된 <막 나가는 뉴스쇼>다. 이제는 생명력이 다해가는 <썰전>과 같은 시사예능의 다음 버전을 지향하는 뉴스예능이라니 기대가 갈 수밖에 없었다. 기존 시사예능의 핵심이 뉴스와 이슈의 해설과 논평의 영역에 있었다면 <막 나가는 뉴스쇼>는 연예인들이 기자가 되어 정치부터 문화까지 분야에 관계없이 직접 취재를 한다는 예능형 뉴스쇼를 표방한다. 여기에 김구라, 전현무, 장성규, 최양락 등 거물급 MC와 대세 출연자들이 함께하는 호화스러우면서도 신선한 캐스팅까지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독설과 금기를 무기삼아 정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평이한 MC가 된 김구라가 예전 인터넷방송 시절 미국 쇼트트랙 선수 안톤 오노의 부모님을 찾아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모처럼 어울리는 도전을 잘 해낼지, 유튜브채널 <워크맨>에서 선을 넘나드는 줄타기를 하는 장성규가 조금 무거워진 자리에서는 어떤 퍼포먼스를 보일지, 어느덧 아나운서 출신 후배가 한껏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전현무는 선배이자 톱MC다운 연륜을 드러낼지 기대가 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꽤나 도전적인 제목과 달리 ‘방황’이란 두 글자만 남기고 문을 닫은 <썰전>의 2부가 떠올랐다. 2명만 타도 정원 초과되는 엘리베이터의 괴담을 밝히려 퇴마사까지 초대했음에도 맥 빠진 결론으로 마무리한 ‘팩트체크’, 혐한 관련 현지 취재를 다녀온 ‘현장 PLAY’, 신림동강간미수사건 현장 취재, 마약 단속 경찰을 모시고 마약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무러보라이브’ 등 다채롭게 준비한 4가지 코너와 <뉴스룸> 앵커브리핑 패러디 등을 선보였지만 예능인이 나오는 것 이외에 ‘예능’이라 이름 붙일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특히 큰 기대를 모았던 김구라의 혐한 반응 취재기는 인터뷰하고자 한 혐한 3인방에게 끝내 마이크를 건네지 못하며 애초의 기대와 달리 유명 유튜버 ‘롯본기 김교수’를 만나 현지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서점가를 돌아보고 일본 우익 시위자와 간단한 인터뷰를 나누는 등 일반적이고 간단한 이슈 스케치로 대신했다. <막 나가는 뉴스쇼>는 스스로를 ‘취재하고 풍자와 해학을 담아 보도하는 예능형 뉴스쇼’라고 했는데 취재는 있지만 풍자, 해학과 심층, 특종은 없었다. 특파원 대신 김구라가 갔을 때 나올 수 있는 재미가 딱히 없었다.



연예인이 취재한다는 콘셉트를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 <썰전> 2부의 어정쩡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리를 해야 한다. 사회이슈든 정치든 보다 명확한 분야를 먼저 정하고, 보다 직접적인 뉴스가 될 만한 취재와 논란을 감당할 마음가짐이 필요해 보인다. ‘다스는 누구 것입니까?’와 ‘강원랜드에 몇 명 꽂으셨나요?’라는 인터뷰이를 압박하는 저돌적이고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듣고 싶던 속시원한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모았던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의 ‘흑터뷰’ 강유미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파일럿처럼 뉴스와 예능의 손쉬운 만남은 요즘 예능이 중시하는 재미의 요소인 정서적 즐거움이나 효용이란 측면에서 큰 사랑을 받기 어렵다.

2000년대까지는 일회성 특집 버라이어티쇼가 명절 연휴 안방극장을 책임졌다. 그 후 리얼버라이어티 시대에 접어들면서, 쇼 오락, 코미디가 예능의 보편에서 밀려나고 스토리텔링과 기획이 중시되면서 파일럿 제도가 보편화됐다. 명절 연휴는 다음 시즌, 혹은 다음 패러다임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적절한 실험 무대로 새로이 발견됐다. 그런데 이번 추석을 기점으로 그 실험 무대에 막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재방송이 더 나은 효율을 낸다는 근시안적인 판단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방영된 파일럿들도 예년에 비해 실험성이나 폭발 가능성 모두 소소하다. 따라서 개별 파일럿 예능의 가능성을 짚어보는 것보다도 ‘파일럿이 사라졌다’가 이번 추석 연휴 예능 트렌드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JTBC, KBS,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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