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조커’, 가짜 옛날 영화를 만든다는 건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오프닝에서 제작사의 옛날 로고를 쓰는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이 나왔다. 하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신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고 다른 하나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이다.

둘 다 납득할만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1969년을 배경으로 한 타란티노 영화이니 안 그러면 이상할 것이다. <조커>는 마틴 스콜세지와 윌리엄 프리드킨의 젊은 시절 영화들을 대놓고 오마주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배경의 가짜 옛날 영화로 로고 역시 1972년에서 1990년 사이에 쓰던 것을 가져왔다.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으면서 당시 영화의 질감이나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오는 유행은 꽤 되었다.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이나 <캐롤> 같은 작품들이 먼저 떠오른다. 특히 엘머 번스타인의 고풍스러운 음악과 함께 시작하는 <파 프롬 헤븐>의 오프닝은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속일만 하다.



하지만 완벽하게 가짜 옛날 영화를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당시에 만들어진 진짜 영화들이 있는데?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가짜 옛날 영화라도 결국 현재와 과거의 대화일 수밖에 없다.

<파 프롬 헤븐>이나 <캐롤>은 그런 면에서 완벽한 정당성을 가진다. 이들은 모두 더글러스 서크 스타일의 1950년대 멜로드라마의 모방으로 시작하지만 다루는 소재는 인종간 로맨스와 동성애로, 당시 메이저 영화는 절대로 다룰 수 없었던 것이다. 스타일과 주제의 결합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를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조커>는 잘 만든 재창작이다.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 <프렌치 커넥션>과 같은 고전에서 재료들을 가져왔는데 그걸 자기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실력은 상당하다. 슈퍼히어로 코믹북 캐릭터를 가져왔으면서 지금은 많이 식상해진 슈퍼히어로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하지만 캐릭터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좀 움찔해지게 된다. <조커>는 정신적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위험한 남자의 피해망상적인 내면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재는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정당화할 수 있다. 젊은 스콜세지를 모방한 영화가 스콜세지적인 안티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는 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건 21세기의 소재이기도 하다. 백인 자생 테러리스트와 인터넷 인셀들의 시대에 이들의 내면을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작업일 수 있다. 그리고 <조커>는 꽤 그럴싸한 분석이다.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이치에 맞는 소재를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만으로 영화를 정당화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의도만큼이나, 아니, 의도 이상으로 독자와 팬들의 얄팍하고 즉시적인 반응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런 면에서 <조커>는 건성이다. 얼마나 건성인지는 예고편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모 영화 평론가가 예고편을 보고 이 영화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지적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자, 그 트윗에는 수많은 자칭 팬들이 쏟아낸 악플이 붙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인종차별적이거나 여성혐오적이었다. 인터넷에 서식하는 인셀들은 이 영화의 조커를 자기네들의 수호성인으로 떠받들고 이에 반하는 사람들을 테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 우리의 의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이후의 반응을 보면 필립스가 이 답변에 어울리는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캐릭터 오마주라는 핑계도 안 먹힌다. 인셀 시절 이전에도 안 먹혔다. 존 힝클리 주니어가 <택시 드라이버>를 보고 레이건을 저격한 게 1981년이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조커를 흉내낸 남자가 벌인 오로라 총기 저격사건은 2012년에 있었다. 당연히 이런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1980년대와는 달라야하고 새로운 시대환경에 맞게 업그레이드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커>는 반대로 간다. 이 영화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오로지 이 망가진 백인 남자의 내면만을 다루고 이 남자의 망상과 감정을 부추기고 이를 객관화시킬 외부 관점을 거의 주지 않는다. 예술적 선택이라는 것만으로 이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오로라 총기 저격 사건 희생자의 유가족에게 물어보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스포일러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스포일러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무언가는 아니다. 이미 타란티노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한 번 한 게임이다. 이 영화에서도 타란티노는 역사를 바꾼다. 이 타란티노 대체역사에서 맨슨 패밀리는 샤론 테이트와 일행 대신 옆집에 사는 한물간 배우를 공격하다가 역습을 받고 몰살당한다.



타란티노에게 이는 샤론 테이트에 대한 애도의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정신나간 살인사건으로 끝난 옛 시대에 대한 애정어린 예찬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매우 타란티노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선택은 지금 와서 보면 눈치 없거나 의도적으로 비열하게 보인다. 이 영화는 그냥 허공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미투 운동과 와인스타인의 몰락이 한창 진행되고 사람들이 타란티노에게도 일정 책임을 묻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만약에 이 영화가 이에 대한 타란티노의 반응이라면 우리를 이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타란티노가 그리는 1969년의 할리우드는 천국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타란티노식 난폭한 세계이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두 남자 주인공은 모두 타란티노식 배드 보이이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그 좋았던 옛날’의 향수를 버리지 못한다. 두 백인 남자가 세상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신나게 놀았던 옛날.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의 결말은 더 어이가 없다. 이 영화는 타란티노 캐릭터가 샤론 테이트의 살인범을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백인 남자가 자기네 파티를 깽판치러 뛰어 든 이상한 히피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그들의 파티는 계속된다.



타란티노는 이 시대의 할리우드가 백인 남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얼마나 착취적이었고 차별적인 곳이었는지 무시한다. 마고 로비가 연기하는 샤론 테이트는 반 세기 뒤의 영화광이 상상하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 어떤 내면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 샤론 테이트가 당시의 영화판에서 겪었을 진짜 경험에 대해서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갖지 않는다. 더 심한 파트는 브루스 리가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으로 악의를 제거하고 이 농담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타란티노는 샤론 테이트의, 브루스 리의, 낸시 콴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할까. 그건 이 남자가 어쩔 수 없는 오타쿠이기 때문이다. 타란티노의 지식을 이루는 것은 모두 영화나 소설과 같은 창작물들이다. 그리고 타란티노의 이전 영화들의 필터를 통해 과거를 본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제2차 세계대전은 실제 역사 속의 공간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의 공간이고, <킬 빌>의 일본 역시 실제 나라가 아니라 타란티노가 수천편은 보았을 선정영화 속 상상의 공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창작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영화는 허구의 틀 안에 갇히고 만다. 여기서 나오는 변명과 반성은 얇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마음을 열고 이 인공적인 이미지 밑에 깔려있었던 현실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 한다. 그리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타란티노에게 그럴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다는 증거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조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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