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벌 같았지만... ‘동백꽃’ 이정은이 준 큰 위로

[엔터미디어=정덕현] “못해준 밥이나 실컷 해먹이면서 내가 너를 다독이려고 갔는데 니가 나를 품더라. 내가 네 옆에서 참 따뜻했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네가 다 하는 이유는 용서받자고가 아니라 알려주고 싶어서야. 동백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어. 버림받은 일곱 살로 남아 있지 마. 허기지지 말고 불안해 말고 훨훨 살어. 훨훨. 7년 3개월이 아니라 지난 34년 내내 엄마는 너를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했어.”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정숙(이정은)이 딸 동백(공효진)에게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일곱 살 딸을 버리고 간 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편지에 담긴 정숙의 삶은 불행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술 취하면 폭력적인 남편을 버티다 동백까지 다치게 되자 집을 나온 정숙은 갈 곳이 없었고, 룸살롱 쪽방에서 딸과 함께 지냈지만 그 곳은 어린 딸이 지낼 데가 아니었다. 그 어린 아이가 “오빠” 소리를 배우고 따라했으니.



술집 언니들 식모 노릇하며 살았는데 그 곳도 쉽지 않았다. 자꾸 뛰쳐나와 갈 곳도 없는 모녀는 은행을 전전했고 공짜로 주는 박카스를 지겹도록 마셨다. 끝없이 배 고프다는 아이 옆에서 엄마는 결국 절망했다. 자기가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는 아이마저 죽일 것 같았던 것. 결국 엄마는 딸을 살리기 위해 버려야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육원으로 보낸 후에도 정숙은 계속 딸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살폈고 알고 보니 입양 후 파양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이유가 새 엄마가 아이의 그늘에서 술집에서 지냈던 걸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찾은 딸이 진짜 술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엄마는 마음이 아팠지만, 동백이 밝게 웃고 있는 걸 보면서 엄마는 안심했다. 그렇게 긴 세월을 지나 정숙은 동백의 앞에 서게 됐던 거였다. 함께 지낸 세월이 고작 7년 3개월이라며 신장 이식을 받지 않겠다 버티는 정숙에게 ‘7년 3개월짜리 엄마’라고 부른 동백은 그 기간이 짧았어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동백은 아마도 그 나머지 엄마가 자신과 떨어져 지냈던 34년간이 못내 아프고 화가 났었을 게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딸보다 더 아팠다. 그에게도 7년 3개월만이 유일한 삶의 행복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 시간이 마치 “적금 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번 생이 너무 힘들었어. 정말 너무 피곤했어. 사는 게 꼭 벌 받는 것 같았는데 너랑 야 3개월을 더 살아보니까 아 이 7년 3개월을 위해서 내가 여태 살았구나 싶더라. 독살 맞은 세월도 다 퉁 되더라.” 세상에, 사는 게 벌 받는 것 같았다니.

엄마에게 버려져 고아에 미혼모로 살아오며 갖가지 편견 속에서 힘겨웠던 동백의 이야기는 이제 그 딸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지독한 가난과 그 후로 내내 불행한 삶을 살아왔던 엄마 정숙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동백꽃 필 무렵>이 정숙의 이야기로 시청자들에게 하려는 메시지는 뭘까. 도대체 이 정숙의 가슴 아픈 사연의 무엇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이토록 후벼 파는 것일까.



“이번 생은 글렀어”라고 흔히들 말하는 우리들은 때때로 나의 불운이 태생에서부터 결정됐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건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지만, 그런 문제가 야기하는 불행과 비극을 우리는 개인이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 현실이 너무 어려워 때론 삶을 비관한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위축되고 좀체 제대로 날개를 펴지도 못한다. 그래서 미워지기까지 한다. 심지어 사는 게 벌 받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동백꽃 필 무렵>의 정숙은 온 몸으로 보여준다. 누구나 저마다 사랑받지 않은 존재는 없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않은 존재는 없다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건 엄마와 자식 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먼저 떠나버린 향미(손담비)도, 심지어 연쇄살인범조차도 그를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누군가는 있을 테니 말이다. <동백꽃 필 무렵>이 주는 큰 위로는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존재의 꽃을 피워내는 빛이 늘 어딘가에서 비춰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어서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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