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은 있는데 속은 답답한 ‘99억의 여자’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KBS 드라마 <99억의 여자>의 첫 회는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주인공 정서연(조여정)은 폭력적인 가족에서 탈출하기 위해 결혼하지만, 결혼 후에 남편의 집착과 폭력에 시달린다. 이 행운 없는 여자에게 어느 날 행운이 찾아온다. 우연한 사고 현장에서 99억 원을 얻기 때문이다.

불행 끝, 로또 시작인 듯 했던 이 드라마는 하지만 보는 이의 기대를 배신한다. 궁지에 몰린 모르모트 같은 표정을 짓는 정서연에게 해뜰 날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99억으로 백화점 쇼핑도 신나게 하고, 스파도 받아보고, 해외여행도 가고, 빌딩은 못 사도 아파트 두 채쯤 사면서 질리도록 돈을 쓰는 유쾌한 ‘만수르’ 장면은 이 드라마에 없다.

<99억의 여자>는 99억과 얽히면서 더욱 복잡한 사건으로 빠져드는 정서연을 보여주기 바쁘다. 그 때문에 정서연은 운암재단과도 엮이고, 조폭들의 불법도박사이트 회사인 대영테크와도 연이 닿는다. 만 원짜리 불행이 결국 99억 원짜리 불행으로 확장된 모양새다. 99억을 얻은 뒤에도 그녀의 삶은 여전히 불행한 것이다.



이처럼 <99억의 여자>는 만수르 코미디 장르 대신 스릴러를 밀고 나간다. 99억의 돈가방을 통해 쫓고 쫓기는 강렬한 스릴러로 노선을 정한 것이다. 하지만 <99억의 여자>는 한 번 더 보는 이의 기대를 배신한다.

쫀쫀한 스릴러에 익숙해진 시청자에게 99억을 두고 벌이는 소소한 스릴러는 시시하다. 더구나 정서연을 비롯한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그렇게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사건은 두뇌싸움이 아니라 실수 싸움에 가깝다. 그래서 사건 전개를 위한 진행이 다소 허술하게 보이기 일쑤다.

<99억의 여자>는 이 허술한 전개에 긴장감을 채워 넣기 위해 악역전문 배우 정웅인을 정서연의 남편으로 캐스팅한다. 정서연의 남편 홍인표는 여주인공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같은 인상이다.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며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는 정웅인의 연기는 놀랍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놀라움이 감탄이 되는 대신 불쾌감으로 돌아온다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99억의 여자>는 다시 한 번 기대를 배신한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서 배우의 명연기를 보고 감탄하는 데도 한계는 있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악역이 여주인공의 발등을 피 나도록 사포로 문질러 대는 장면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정웅인의 악역 연기가 빛났던 이유는 악역이 빛났던 만큼 다른 캐릭터들도 빛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99억의 여자>에서는 악역 정웅인만 도드라지고, 주인공 정서연은 악역에게 괴롭힌 당하는 여성 캐릭터로 소비된다. 그런 부분에서 <99억의 여자>는 또 한 번 보는 이를 배신한다.

<99억의 여자>의 정서연은 주인공이지만 아직까지는 강박적인 불행만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서연이 아닌 형사 강태우(김강우)처럼 느껴진다. 사건의 키를 쥐고 있고, 주도적으로 사건을 끌고 나가는 것도 강태우다.



그렇기에 정서연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은 이 정도다. 사포로 정서현의 발등을 문지른 홍인표는 아내의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99억을 찾기 위해 잠시 아파트를 떠난다. 마침 그때 이재훈(이지훈)이 정서연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정서연은 악착같이 깨진 유리에 자기 입술을 문지른다. 그리고 테이프가 끊어지고 입술에 피가 흐르고 나서야 겨우 뭐라고 한마디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겨우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전부. 정서연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전부인 불행한 여주인공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최근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잘 나가는 배우 조여정의 연기는 이 드라마에서도 빼어나다. 하지만 그렇다고 <99억의 여자>가 계속해서 보여주는 답답함이 해소될 정도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여주인공 정서연 캐릭터는 더욱 안타깝다.

99억을 얻기 전에 불행했는데, 99억을 얻은 뒤에는 좀 행복해도 되는 거 아닌가? 혹은 99억의 돈다발로 파리 떼처럼 들러붙는 남자들을 후려치며 싸움판의 보스가 돼도 좋은 거 아닌가? 왜 불행한 여자는 99억을 얻은 뒤에도 꼭 불행하게 그려져야 하나.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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