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의 발명과 느려진 진화의 시계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는 인간의 삶을 바꾼다. 도구는 인류 문명이 다른 양상을 띠는 계기를 제공했다.

선행 인류 이래 인간은 돌멩이, 주먹도끼, 막대기 등을 도구로 활용했다. 이들 도구는 분명 우리 선조의 생존에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창은 앞서 나온 모든 도구보다 큰 변화를 일으켰다.

창은 강력한 방어 수단이자 수렵 도구였다. 인간은 전보다 훨씬 당당해졌을 뿐 아니라 들소처럼 크고 힘이 센 동물을 사냥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군림하는 포식자 중 하나가 됐다. 운수에 따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당장 먹을 양보다 많은 고기를 획득하게 됐다. 영양 섭취에서 단백질·지방의 비중이 커졌고, 열매와 뿌리 같은 식물성 영양원이 남게 됐다. 남은 식량이 비축되기 시작했다.

이 단계는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눈부신 도약이었다. 창을 든 인간은, 이전 인류와 비교할 때, 자연으로부터 선택되지 못해 도태되는 위험을 상당히 떨쳐냈다. 이후 인간은 자연에 의해 선택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나갔다.

이전 인간의 적자생존 경쟁이 생태계를 무대로 생태계에 의해서 판정이 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창을 잡은 인간의 적자생존 경쟁에서는 서로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 추가됐다. 잉여가 많아지자 동물 대신 다른 부족을 공격해 잉여를 약탈하는 전쟁이 잦아진 것이다. 이 싸움은 종족을 말살하는 양상을 띠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를 골고루 섞는 과정이 됐다. 원시 시대 종족 말살은 정복자가 상대 종족의 성인 남성을 죽이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양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창은 20만 년 전 무렵에 발명됐다. 현생 인류의 직계 선조인 호모 사피엔스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창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창을 만든 선행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을 가능성은 작다. 그 이유는 다음 문단에서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창을 만들어 활용하면서 지배적인 영장류의 자리를 굳히게 됐다. 인류의 오늘날은 호모 사피엔스가 슬기로운 머리로 창을 만든 데서 비롯됐다. 호모 사피엔스는 창을 만들었고, 창은 호모 사피엔스를 지켜준 셈이다.

창은 인류의 진화에도 영향을 줬다. 창이 나오기 전 선행 인류가 산 시기는 진화의 시대였다. 선행 인류는 선택과 도태의 경계선에서 힘겹게 생존해나갔다. 자칫하면 도태됐고, 유리한 형질은 살아남아 확산됐다. 창이 발명되면서 인류의 형편이 이전보다 좋아졌다. 자연선택의 압력이 누그러졌다. 진화의 시계는 이전보다 느리게 작동했다.

창이 인간 진화를 더디게 했다는 가설이 지지되려면 첫째, 창이 나온 이래 인류의 신체가 별 변화를 겪지 않았어야 한다. 또 20만 년이라는 기간이 큰 진화가 이뤄지기에 충분히 길어야 한다.

사실은 어떤가? 개체가 많아짐에 따라, 또 지구촌 곳곳으로 거주지역을 넓히며 특이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인류는 다양해졌다. 아울러 아종(亞種)과의 교잡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는 지난 20만 년 동안 기본 형질을 유지했다.

또 20만 년은 굵직한 변이가 나타나고 자리잡기에 충분히 긴 기간이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화석 기록을 근거로 들어, “하나의 종이 완전한 진화적 변이를 거쳐 새로운 종으로 변하는 데 평균적으로 약 1만5000~2만 년 걸린다”고 추정했다. 기간은 충분히 길었지만 인류는 진화하지 않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연구자들은 느리게 가던 진화의 시계가 이제 사실상 멈췄다고 본다. 자연 선택의 중요성이 확연히 줄었다. 사람의 유전적인 차이는 DNA를 남기기까지 생존하느냐와 거의 무관해졌다.

생존에 불리한 유전자도 이제는 도태되지 않는다. 먼 훗날 우리 자손 중에는 ‘나쁜 유전자’를 지닌 사람의 비율이 지금보다 높아질지 모른다. 나쁜 유전자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유전자를 둘러싼 관심과 논란이 앞으로 더욱 뜨거워지겠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자료]
중앙일보, 네안데르탈인 피 우리 안에 흐른다, 2011.8.27
리처드 랭엄, 요리 본능, 사이언스북스, 2011
테트레프 간텐 등, 우리 몸은 석기시대, 중앙북스, 2011

[사진=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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