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삼분지계의 이 달의 생각] ③ 집안에 콕 박혀 있을 당신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사람냄새 나는 청담동으로, 녹음이 우거진 산으로, 늘 활기찬 브루클린으로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의 이 달의 생각] ◾편집자 주◾ 21세기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숨가쁘다.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를 다 챙겨보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시대, 당장 눈 앞의 변화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초점을 잃게 된다. 그래서 TV삼분지계는 생각했다. 매주 방영되는 프로그램 리뷰 말고, 보다 더 긴 호흡으로 TV를 곱씹어 볼 수는 없을까? TV삼분지계는 한 달에 한 번, 특정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해보기로 했다. 지금 당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이야기에 얽매이지 않고, 더 긴 호흡으로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로. 이름하여 [TV삼분지계의 이 달의 생각]이다.

햇살은 따사롭고 창 밖에 꽃들은 만발했는데, 그냥 창 너머로만 봐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쓸고 다니는 지금, 백신이 나오기까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최대한 전염을 피하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고 볼일 다 봤으면 냉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다. 이 상황에도 밖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해야 하는 이들의 불편함에 비할 바 있겠냐마는, 집 안에만 콕 박혀 있는 이들 또한 좀이 쑤셔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들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다. 본래 집에서 TV 보고 글 쓰는 게 일인 사람들이니 좀 낫지 않겠냐 싶겠지만, 자의로 집에 있는 것과 타의로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다.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의미에서,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들이 집에서 볼 만한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꺼내 왔다. 정석희 평론가는 주소지만 청담동일 뿐 하루하루 찰랑찰랑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을 그린 JTBC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를, 김선영 평론가는 지금은 직접 보러 갈 수 없는 산과 들의 풍광으로 가득 찬 일본 WOWOW 특집극 <산의 톰씨>를, 이승한 평론가는 시끌벅적 떠들썩한 미국 FOX 경찰시트콤 <브루클린 나인나인>을 추천했다. 집 안에서 보내야 하는 날들이, [TV삼분지계]가 추천한 프로그램들로 조금은 덜 고단하고 더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원한다.



◆ <청담동 살아요> - 자각과 통찰, 반성을 아는 ‘꼰대’를 만나러 가자

JTBC <청담동 살아요>. 2011년 12월 5일부터 2012년 8월 3일까지 방송된 170부작 시트콤. 말만 청담동이지 지도에도 아니 나올 법한 좁고 낡은 2층짜리 건물에서 만화방을 경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김혜자(김혜자) 씨네 이야기다. 정감 가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매회 혜자 씨 내레이션이 압권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번 달도 간신히 버틸 것 같습니다. 항상 딱 필요한 만큼 찰랑찰랑하게 채워지는 내 가계부.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가계부의 목줄을 쥐고 있다가 필요한 양의 눈금까지 딱 재고 닫아버리는 것처럼, 어쩜 그리도 얄짤 없는지요.” 이 대사,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폐부를 아프게 찌른다.



그러던 어느 날 혜자 씨는 백화점 문화센터의 착오로 문인클럽 회원 카드의 주인이 되고 세상을 다 얻은 양 기뻐한다. 건조한 삶에 한 줄기 단비가 내리듯 설레는 마음으로 시 수업을 듣게 되는데, 하루는 시 주제 ‘내 인생의 한 마디, 나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킨 한 마디’를 두고 고민한다. 온종일 머리를 쥐어 짜내 봤자 감동은커녕 가슴에 대못을 박은 말들만 새록새록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인간은 남에게 들은 서운한 소리만 기억하지 자신이 쏟아낸 모진 소리들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성한다. 누군가의 독설로 상처를 받은 만큼 나 또한 깊은 상처를 주었으리란 것을. 매일매일 ‘청담동’이라는 허상에 휘둘려 허덕이는 뱁새 혜자 씨지만 자각과 통찰, 반성을 아는 ‘꼰대’라서 좋았다. IPTV와 왓챠플레이로 다시 보실 수 있고, 유튜브에서 <청담동 살아요 Reboot>로 볼 수 있다.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산의 톰씨> - 산, 꽃 그리고 고양이. 이걸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작가 하나(고바야시 사토미)와 친구 토키(이치카와 미카코)의 시골집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온다. 톰이라는 이름의 이 고양이는, 천장에서 “대운동회”를 벌이는 쥐 떼를 소탕해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는다. 온 식구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무럭무럭 자라는 톰. 마침내 그가 처음으로 개구리를 잡아 왔던 날, 식구들의 기대는 더 높아진다. “대단하네, 톰. 움직이는 걸 잡을 수 있게 되었구나!” 하지만 막상 건장한 고양이로 자라난 톰은 좀처럼 쥐를 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드라마 <산의 톰씨>는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시골에서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담아낸다. 그 일상의 주인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다. 고양이, 닭, 염소와 같은 동물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식물들, 그리고 밤하늘의 별까지 포함한 온 세상이다. 자연의 법칙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이곳에서 미스터리는 자리할 틈이 없다. ‘고양이 톰은 과연 쥐를 잡을 수 있을까?’가 제일 큰 관심사인 하나와 토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부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해는 금물. 이들의 시간이 마냥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지만, 거기에 압도되지 않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마지막 신에서 토키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던 하나가 건넨 말에는 그러한 삶의 철학이 압축돼 있다. “자유, 책, 꽃, 달이 있다. 이걸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일도 잘 부탁해.”



2015년 일본 에서 연말 특집드라마로 방영된 <산의 톰씨>는 꾸준한 호평 속에 2018년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되기까지 했다. 소설 <카모메 식당>의 작가 모레 요코, 영화 <카모메 식당>의 주연 고바야시 사토미, 드라마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의 이치카와 미카코 등 ‘믿고 보는’ 힐링 아이콘들이 뭉친 작품이다. 현재 왓챠플레이, 포털 사이트의 다운로드 서비스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 <브루클린 나인나인> - 시끌벅적 떠들며 성장하는 어른이들의 성장극

뉴욕 브루클린의 99번 관할서에서 근무 중인 형사들은 모두 어딘가 조금씩 나사가 풀려 있다. 영화 <다이하드>에 감명을 받고 경찰이 되었지만 위생관념부터 금전감각까지 10대 소년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 제이크(앤디 샘버그)부터, 매사에 완벽해야 한다는 우등생 강박에 시달리는 에이미(멜리사 퓨메로), 소심한데 오지랖은 넓은 찰스(조 로 트루글리오), 조금만 성질을 긁으면 바로 폭력으로 대응하는 로사(스테파니 베아트리즈) 등의 형사들이 모인 99서는 단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지 못한다. 이 시끌벅적한 99서에 뉴욕 경찰 최초로 커밍아웃한 흑인 게이 형사 출신의 새 서장 레이먼드 홀트(안드레 브라우어)가 취임하면서, 99서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를 그만 두며 아예 방송을 쉴 생각이었던 앤디 샘버그가 대본을 읽자마자 계획을 미루고 바로 뛰어들었던 시리즈인 <브루클린 나인나인>은, 온갖 화장실 유머와 섹스 농담들을 뒤섞어 한바탕 소란을 펼쳐 놓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불쾌한 선은 넘지 않는 묘를 발휘하는 탁월한 오피스 코미디다. 특히나 – 동아시아인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아쉬움은 크지만 - 인종적으로나 성 정체성으로나 되도록 다양한 정체성의 인물들을 코미디 안에 끌고 들어와서 자연스레 어울리도록 조율하는 제작진의 균형감각은 여러모로 탁월하다. 천방지축이던 주인공들이 시즌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성숙해지고 책임감을 갖추며 인종차별이나 성희롱, 커밍아웃 등 여러 가지 진지한 이슈들을 다루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코미디의 본령인 유쾌함을 잃지 않는 기세는 주목할 만하다.



등장인물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천천히 공들여 설득해내는 건, 오랜 시간 사랑받으며 팬들과 함께 늙어가는 시리즈만이 해낼 수 있는 장기일 것이다. 미국 FOX에서 5개 시즌을 방영했고, FOX가 더 이상의 시리즈 방영을 포기한 바로 다음날 NBC가 잽싸게 방영을 결정해 현재 7시즌을 방영 중이다. 한국에서는 넷플릭스를 통해 (5시즌까지) 감상하실 수 있다.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이 유쾌한 형사들이 다시 브루클린의 거리를 누비는 광경을 보고 싶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JTBC, WOWOW(일본), FOX(미국).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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