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달리기를 시작한 지 9년째다. 달리다 보면 온갖 상념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떠다니다 사라진다. 되돌아보면 뛰면서 얻은 생각 중에 손에 잡힌 건 없었지 싶다. 하지만 달리기 덕분에 건강은 확실히 챙겼다고 자부한다.

마라톤 풀코스 42.195km를 4시간 안팎에 들어오려면 머리부터 척추를 거쳐 발끝까지 건강해야 한다. 나무로 치면, 잎이 좀 떨어지고 잔가지는 일부 부러지거나 상했더라도, 뿌리부터 우듬지에 이르기까지 튼튼해야 한다. 정신도 건강해진다. 달리면 스트레스가 씻겨나갈 뿐 아니라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내성도 키울 수 있다.

내 정신은 건강한 상태를 넘어 오만해졌다. 난 2년째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 마스터스 마라토너는 건강검진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어설픈 논리까지 개발했다.

“일년에 풀코스를 두 번 이상 완주하는 사람은 건강검진을 안 받아도 된다. 연 2회 완주할 체력에 이르도록 몸을 관리한다는 것은 온갖 병의 원인을 몸에 들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물론 마라톤이 난치·불치병을 예방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내가 난치·불치병에 걸렸다면 건강검진을 매년 받아 미리 알게 된 들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는가.”

난 건강에 관한 한 교만하게 됐다. 건강이 화제에 오를 때면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병원에 간 기억이 없어”라는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곤 이내 “치과 빼고”라고 덧붙이곤 했다.

그러던 내게 모처럼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장기 무사고 운전자에게 자동차 보험료를 할인해주잖아. 같은 원리로 일년에 예컨대 2회 이상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에게는 건강보험료를 깎아줘야 하지 않나? 더 많은 사람이 달리고 건강해지면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건실해져서 아픈 사람에게 보험금을 충분히 지급할 수 있지 않을까? 내게서 이 아이디어를 들은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은 “지당한 말씀”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뭐하나. 세상이 몰라주는데.’ 세상을 탓하지 않기로 하고 지내던 내게 오늘 소식 하나가 들어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1회 건강달리기 축제’를 연다는 내용이다.

‘건강보험료에 대해 말을 걸 고리가 생겼군. 달리면 건강해, 건강하면 병원에 덜 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달리기 축제만 열 게 아니라 달려서 건강해지면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를 걸어야 한다고 제안하자. 이름하여 ‘풀코스 완주자 건강보험료 할인’이지.’

정치의 계절을 맞아 경쟁적으로 제시되는 선심성 공약에 비해 얼마나 건강한 아이디어인가!

자찬하려던 내게 내 속의 누군가가 묻는다. ‘바보야, 풀코스 완주자한테 할인 혜택을 준다고 하자. 뛰지 않는 사람들 반응을 예상 못하겠나?’

마라톤만 운동이냐며 사이클동호회에서 주요 도로를 휩쓸며 ‘질주 시위’를 벌인다. 좌시할 조기축구회가 아니다. 수영·요가·생활체육 등 온갖 운동단체가 들고 일어난다.

‘아, 그래서 마라토너 건강보험료 할인이 안 되는구나.’

하지만 나는 좀 끈덕지다. ‘좋다, 그러면 마라톤과 모든 운동에 동등한 기회를 달라고 하자. 건강 평가 기준은 건강진단 등급으로 하면 되고. 건강진단 상위 등급에 들면 건강보험료를 할인해주는 제도를 도입하자고 제안하자.’

자료를 찾아본다. 오호라. 생명보험회사에서는 이미 그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덜 알려지고 덜 활용돼서 그런지 이름은 생경하다. ‘건강체(우량체) 할인’제도라고 한다.

국민 건강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재정 건전성을 위해 한 번쯤 논의해볼 만한 아이디어가 아닐까? 아닌가?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서울중앙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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