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탑방>, 왕세자가 미련곰퉁이가 아니어서 다행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SBS <옥탑방 왕세자>에서 여전히 ‘야자 타임’ 중이려니 착각한 우용술(정석원)이 머뭇거리던 끝에 넌지시 속내를 내비치자 격노한 왕세자 이각(박유천)이 단호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만보(이민호)야, 용술이 칼 가지고 오너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상황이지 뭔가. 현세인 것이 천만다행, 만약 그들이 살았던 조선시대였다면 용술은 정녕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아니 본인 목숨뿐만이 아니라 삼족이 절단이 나고도 남음이 있을 도발이다.

그러나 “나이도 어린 게, 부모 잘 만나 가지고 그냥.....”, 타이밍이 어긋나서 그렇지 우용술이 내뱉은 이 한 마디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차마 이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삼키고 말았겠나.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덕에 별 노력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존재들, 계급장을 떼고 보면 잘난 구석 하나 없건만 단지 돈이며 권력에서 밀린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늘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던 억울한 이들이 오죽이나 많았겠는가 말이다.

엄연히 만인지상의 왕이 존재하고 반상의 구별 또한 시퍼랬던 지난날이야 그렇다 쳐도 왜 만민의 평등을 부르짖는 오늘 날까지 왕 노릇을 하려드는 인간들이 부지기수인지 원. 하기야 재물보다 더한 권력이 또 어디 있으리. 생각해보면 과거 왕들보다는 지금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오히려 더 풍족하고 안일한 삶을 만끽하고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300년 전으로부터 온 왕세자 이각 역시 드라마나 소설 속에 흔히 등장하는, 부모 잘 만나 왕세자 노릇하는 유약한 왕손이겠거니 했다. 세자빈의 죽음을 낱낱이 파헤치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나섰지만 단서를 찾기는커녕 대책도 없이 화살받이가 된 장면을 보며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혀를 찼었다.

최근 들어 세종이나 정조 같은 임금이 달리 표현되고는 있지만 우리가 지금껏 만나온 왕손의 대부분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래서 왕세자 이각도 어마마마며 할마마마의 치마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후궁들의 암투에 어이 없이 휘둘리거나 조정 신하들의 “전하, 그리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에 옴짝달싹 못했던 과거 왕들처럼 제 몸 하나 건사 못하고 온갖 민폐 다 끼치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천지분간 못하고 양반다리 떡하니 하고 앉아 신하들을 수족처럼 부려가며 왕세자 노릇을 계속하려 들 줄 알았더니만, 이게 어인 일인가. 이렇게 적응력이 뛰어날 수가 있나! 사리판단이 확실한데다가 총명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홈쇼핑 계의 거목 여길남(반효정) 회장의 손자 용태용이 자신의 환생이라는 걸 대번에 감지해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현세로 왔다는 건 용태용이 죽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도 꿰뚫어 보고 있지 않은가. 미련곰퉁이처럼 세자빈의 환생인 홍세나(정유미)를 비롯한 악인들의 술수와 모함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려니 했더니, 현세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신세를 져가며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더니만 그와는 반대로 300년에 걸쳐 이어진 악연을 풀기 위해 과거로부터 파견을 나온 상황인 모양이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건 그가 지닌 가차 없는 결단력이다. 공자 말씀을 법으로 알고 평생을 살아왔을 터, ‘신체발부수지부모’를 내세우며 고집을 부릴 만도 한데, 머리를 잘라야 오늘에 적응할 수 있고 적응을 잘 해내야 이 매듭이 풀리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기에 오히려 신하들을 독려해 단발을 감행한 것이다. 쓸데없이 틀에 얽매여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을 할 줄 안다는 게, 그리고 생각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즉시 행동으로 옮길 줄 안다는 게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적어도 외세에 쫓겨 이리저리 떠돌다가 백성에게 물고기 한 마리 얻어먹고는 은어라고 부르랬다가 궁으로 돌아와서는 도루묵이라 부르랬다가, 우왕좌왕했다는 무능한 임금처럼은 아니 될 예감이니 반갑지 않나.

그러나 세자빈의 환생인 홍세나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욕심 앞에서는 천륜을 거스르는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악녀라는 걸 이각, 그가 짐작이나 할까? 하지만 세자빈의 동생 부용화의 환생인 박하(한지민) 또한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지혜로운 이각과 순수하고 당찬 박하가 뜻을 모은다면, 그리고 꽃미남 신하 3인방이 힘을 보탠다면 수백 년에 걸친 악연이 아무리 질기다 한들 거침없이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간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마음 놓고 두 사람을 지켜볼 수 있어서.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그림 정덕주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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