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고 답답한 일개 근위대장을 좋아한다고요. 맞아요. 약해진 거죠. 그쪽을 계속 내 옆에 앉히고 싶었어요. 떼쓰고 싶고, 장난치고 싶고, 시비 걸고 싶고. 그러다 아까 알았어요. 아,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니까 나 포기하지 말아요. 그쪽처럼 용기내볼 게요. 은시경(조정석) 씨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 볼 게요. 지켜봐주세요. 꼭.”

- MBC <더 킹 투하츠>에서 공주 이재신(이윤지)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서릿발 같은 자존심을 지닌 은시경(조정석) 대위가 사악한 살인마 존 마이어(윤제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공주 이재신(이윤지). 자신의 안위가 빌미가 된 일이기에 감복한 나머지 이처럼 그를 좋아한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휠체어를 타고 존 마이어가 ‘수준이 안 되는 왕실’ 운운하며 비난을 퍼붓고 있는 ‘한반도 평화 포럼’ 현장으로 달려가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만인 앞에 당당히 일어서 보였다. “지금 한국은, 대한민국은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기 위해 WOC 단일팀으로 평화를 다져나가고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일어설 때 이 워킹수트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세계 각국 여러분들의 지지와 격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켜봐주세요. 노력하겠습니다.”

어느 누가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있겠나. 반갑게도 총명하고 진취적이었던 예전의 공주로 돌아와 준 것이다. 사람은 누가 곁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 정의롭고 따뜻한 그의 인품이 절망의 나락에서 공주를 일으켜 세웠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지간히 나이를 먹고 나면 과일을 깎을 때 칼이 들어가는 첫 느낌만으로도 맛의 여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첫 느낌으로 안다.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은시경 대위도 처음 보는 순간 그 즉시 괜찮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었다. 세계장교대회(WOC)에 남북장교 단일팀 출전이 결정되어 당시 왕제였던 이재하(이승기)가 납치되듯 팀에 합류하던, 바로 그날 말이다.

훈련장 셔터가 서서히 올라가고 모습을 보인 은시경 대위가 “5보 앞으로!”를 외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기야 학수고대해온 제대 당일, 사인 한번 잘못하는 바람에 장교 계급장을 달고 다시 군대로 끌려 왔으니 송곳에라도 찔린 양 펄펄 뛰는 건 당연지사. 그런 왕제를 카리스마로 제압하기 시작하는데 그 눈빛이며 당당한 자세며, 허세어린 호통에도 까딱 않는 배짱하며, 두루두루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절대 아닌 사람으로 보이지 않던가. 만약 이재하가 이 청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름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막상 훈련이 시작되자 기대와는 달리 약삭빠른 이재하의 작전에 자꾸 말려드는 통에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사실 나는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은 딱 질색이어서 은시경 대위가 팀장답게 망나니 이재하의 혼쭐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혼은커녕 만날 왕제가 벌려 놓은 사건사고 뒷수습에 바쁘니 복장이 터질 밖에.

하지만 아무리 우리나라 팀 팀장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상대는 국왕의 동생이었지 않나. 더구나 부친(이순재)이 왕실 비서실장이니 여러모로 운신의 폭이 좁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게다. 아무리 그래도 북한 조장 김항아(하지원) 씨에게 기타를 치며 로맨틱한 노래를 불러주지 않나 난데없이 눈싸움을 하질 않나, 의외의 모습을 보일 때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국왕 시해의 주범인 김봉구, 즉 클럽 M의 주인 존 마이어와 맞닥뜨리자 처음의 그 서슬 퍼런 느낌이 되살아난 것이다. 원하는 걸 다 줄 테니 자기 사람이 되라며 되도 않는 소릴 지껄이는 클럽 M 회장 김봉구(윤제문)에게 시원스레 한방을 날려버린 은시경 대위. “죄송합니다. 저는 썩은 과자는, 안 먹습니다.”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데 2012년을 통틀어 최고의 남자로 꼽는다 해도 손색이 없지 싶다.

“이재하는 참 좋겠다.” 오죽 멋있었으면 악랄하기 그지없는 김봉구조차 감탄을 했을까. 나 또한 은시경 대위처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곁에 둔 이재하가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은시경 대위에다 김항아까지, 인복 하나는 타고 난 국왕이다. 그러나 앞으로 은시경 대위가 걸어야 할 길이 구만리이니 어쩜 좋을꼬.

무엇보다 평생 존경해온 부친의 과오를, 실수를 제 때에 밝히지 못해 김봉구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된 사정을 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모르겠다. 사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부친을 단죄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테니까. 그처럼 은시경 대위에게는 험난한 날들이 줄을 이어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그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밝은 미래를 봤다.

세계장교대회(WOC) 때 외국인 참가자들이 주고받던 얘기가 생각난다. “걔네들 맨날 편 가르고 싸웠대. 남북으로 동서로. 팀웍? 어림도 없어. 국민성 자체가 분열이 취민데 뭐.” 북한 군관 이강석이 이 말에 발끈해 사고를 치고 말았으나 솔직히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분열이 취미라는 게 영 틀린 소리는 아니지 않나. 그래도 은시경 대위 같은 개념 찬 젊은이가 우리 곁에 하나 둘씩 늘어난다면, 공주가 그랬듯이 사람들이 달라지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런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한다면 수백 년간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온 편 가르기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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