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주인공들 왜 그리 아까운 마음이 없나?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이틀 내리 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 전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손수 뜯어 들고 나오셨지 싶은 푸성귀 몇 가지를 놓고 파시던 할머님이 생각났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밀려오는 날 더운 오후에 손바닥만 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펼쳐놓으시고는 막상 호객은 못하시고 누가 좀 안 사주나, 오가는 이들 눈치만 살피고 계셨는데 자그마하니 초라한 행색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깊게 패인 주름살이 왜 그리 서글프던지. 선크림이 지천이고 보톡스 주사가 판을 치는 세상이건만 오죽이나 오래도록 밭일을 하셨으면 피부가 저렇게 되셨을까, 마음이 여간 언짢은 게 아니었다.

뭐든 팔아드리고 싶은 마음에 기웃거리다 저녁 찌개에 넣을 미나리를 좀 주십사 했더니 생각보다 너무 많이 주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 그냥 가져가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상추며 쑥갓을 더 사가지고 돌아섰는데 어림짐작해보니 운이 좋아 자리에 놓인 걸 다 파신다 해도 이삼만 원 남짓? 그 돈을 버시겠다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이고 지고, 마을버스와 돈 안 드는 지하철을 갈아타시며 멀리서부터 오셨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안타까운 건, 이렇게 날씨가 궂으면 그나마 공치시는 날이 아니겠나. 어디 그분뿐인가. 친구네 동네에 갈 적마다 마주치는, 마치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송이뿐 할머니처럼 하루 온종일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시는 할머니께서도 하루벌이를 못 하시게 된다. 지금쯤 내일은 날이 말짱해지려나? 하고 두 분 모두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시지 않을까?

사는 게 이리도 팍팍한 시절이거늘 드라마에서는 마냥 딴 세상이 펼쳐진다. 하기야 드라마니까. 수십억 수백억이 들고 나는 재벌 놀음이나 정치판 돌아가는 얘기야 현실감이 없는 아스라이 먼 세상 얘기인지라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또 사극이나 시대극, 블록버스터 급 드라마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깨고 부시는 장면들이야 장르가 그러니까 하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현실감이 살아 있는 드라마에서 내 자식 같은 젊은이들이 돈 무서운 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걸 볼 때면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곤 한다.







솜털 보송보송한 여고생이 남의 집에 들어갈 목적 하나로 겁 없이 의자로 창문을 내리쳐 박살을 내질 않나(KBS2 <빅>), 나이깨나 먹은 남정네들이 제 성질에 못 이겨 앞 차를 들이박지를 않나, 휴대폰을 깨부수질 않나, 괜스레 잘 쓰던 노트북을 망가트리질 않나(SBS <신사의 품격>). 그리고 여자라면 다들 아쉬워했을 장면, 이 드라마에서도 저 드라마에서도(SBS <신사의 품격>, MBC <아이두 아이두>) 멀쩡한 구두들이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값나가는 구두들이. 살림하는 주부 입장에서는 아무리 드라마라서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보려 해도 도무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화가 나면 잠깐 진정해 마음을 가라앉히면 되고, 마뜩치 않으면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팔면 되지 왜 내다 버리느냐고. 차라리 돈으로 바꾸어 누군가를 돕기라도 하란 말이다.

성질대로 물건만 망가뜨리고 버리는 게 아니다. KBS2 <빅>에서 중국 여행을 떠나는 길다란(이민정)을 배웅하러 공항에 간 강경준(공유)은 그녀가 여권과 비행기 표를 차 안에 놓고 내리자 쾌재를 부른다. 날아가 버릴 수십만 원의 여행 경비 따위는 아예 염두에도 없다. 그저 자기 뜻대로만 되면 좋은 것이다. 그런가하면 비싼 공연이라며 친구가 건넨 공연 티켓도 길다란 대신 바라지 않았던 장마리(수지)가 오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린다. 보아하니 오페라 공연, 짐작컨대 십만 원은 훌쩍 넘는 가격이었을 게 아닌가. 한쪽에선 그 공연을 보고 싶어서 아끼고 아껴 돈을 모은 사람도 있었을 텐데 한쪽에선 쉽게 얻고 너무나 쉽게 버리는 풍토가 아쉽다.

왜 그리 아까운 마음이 없을까? 만약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그랬다면 한 동안 인터넷이 들끓고 남을 일들이 드라마 속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것이다.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한번쯤 되짚어봐야 할 일은 그처럼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는 캐릭터를 멋있는 쪽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아닐는지.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그림 정덕주


[사진=K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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