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어애프터> 리뷰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새영화가이드] 공교롭게도,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영화 <히어애프터>의 도입부 장면은 참혹한 쓰나미 장면이다. 영화는 2004년 인도양의 휴양지를 덮친 쓰나미를 모티프로 한 것이지만 그 광경은 보다, 그리고 매우 현재적이다. 지금 다시 영화에서 쓰나미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의 참사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장면은 거의 블록버스터급 수준으로 찍혔다. CG와 대형세트가 기막히게 잘 혼합돼 있어 실제로 가공할 쓰나미의 위력을 눈앞에서 느끼는 듯 하다. 지난 2월의 제83회 아카데미가 왜 이 영화를 시각효과부문 후보에 올렸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우디 앨런과 경쟁하듯, 최근 몇 년 전부터 평균 1년에 한편씩 영화를 찍어대고 있는 老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번에 다룬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죽음의 과정, 그 이유와 원인 등등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그 이후, 제목 그대로 ‘히어애프터’ 곧 사후세계에 대한 얘기다. 죽고 난 다음의 세상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는 죽음을 매우 다른 방정식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죽음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바로 그점이야말로 이제 팔순을 넘긴 노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다.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건 역설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순간이 늘 덧없고 허무하며 무엇보다 매우 갑작스럽게 닥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죽음은 종종 예고되지 않은 형태로 다가오며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의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그건 한편으로 생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얘기이며 또 우리 모두의 얘기이기도 하다.

파리의 한 유명 방송국에서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마리(세실 드 프랑스)는 요즘 한창 상종가를 치고 있는 여성 앵커다. 그녀는 자신의 프로듀서인 내연남과 인도네시아로 밀월여행을 왔다가 쓰나미의 재앙에 부딪힌다. 간신히 살아난, 사실은 죽었다가 깨어난 마리는 파리로 돌아간 후 뭔가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있음을 감지한다. 방송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죽음을 경험한 이야기로 책을 쓰기 시작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조지(맷 데이먼)는 사실 탁월한 능력의 심령술사다. 그는 실제로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하늘이 준 축복, 은혜가 아니라 저주라고 생각한다. 일생을 죽은 사람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괴물이라고 부를 정도다. 조지는 심령술사 일을 피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난다.

런던에 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클란)는 쌍둥이 형인 제이슨과 함께 알코올중독과 약물중독에 빠져있는는 홀어머니를 부양하며 살아간다. 못난 엄마보다 아이 둘은 더 영특하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나다. 엄마가 중독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한 날, 그래서 모처럼 둘이서 웃으며 얘기를 나눌 수 있던 날, 제이슨은 동네 깡패를 피해 달아나다 차에 치어 죽고만다. 갑자기 자신의 반쪽을 잃어버린 마커스는 죽은 제이슨과 대화를 하겠다며 심령술사를 찾아 나선다.

세 인물을 중심으로 산개해 나가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정점을 향해 달리는 느낌을 준다. 마리와 조지와 마커스는 이제 막 런던 북페어에서 조우할 참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죽음의 고통과 혼란스러움, 고독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건 바로, 살아가는데 있어 사랑과 희망의 관계를 새롭게 포착해 내는 일이다.



세 명의 주인공을 동등하게 다루고 있는 척, 영화는 심령술사인 조지의 이야기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조지야말로 어쩌면 죽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던 마리가 죽음에 집착하는 것과는 달리, 반대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쌍둥이 형을 잃은 소년 마커스가 죽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는 달리, 조지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그 둘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쓴다. 죽음은 삶이며 삶은 곧 죽음이라는 명제를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그건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이 대재앙의 시대, 늘 죽음을 옆에 끼고 살아가야 하는 시기에 있어, 영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욕망과 이성은 한 몸뚱이이다. 영화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양, 사실은 강렬한 삶의 의지를 피력한다.

영화는, 도입부 10분간에 펼쳐지는 강렬한 쓰나미 장면 탓인지 이후부터의 호흡은 매우 느리게 느껴진다. 등장인물 세 명의 이야기를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리듬도 다소 빈약하다.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의 밀도를 더 두텁게 했으면 좋았을 법 싶었다. 인물들이 보다 구체적인 삶으로 한발짝씩만 더 나아갔으면 했지만 오히려 발을 빼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컨대 조지에게 접근했다가 그가 신통한 심령술사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게 되는 멜라니(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같은 캐릭터가 좀더 밖으로 나왔어야 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점점 더 말년으로 갈수록,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를 강조하고자 의도적으로 디테일을 죽이는 경향을 선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연재해때문이든 아니면 극악한 테러행위때문이든, 죽음의 공포가 너무나 흔한 일상사가 돼버린 지금의 시대에 사랑과 희망을 통해 극복해 나가자는 노감독의 얘기는 종종 가슴을 친다. 사랑과 희망따위는 진부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랑과 희망은 원래가 진부한 범주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이 영화가 2% 부족한 느낌이지만 별로 탓하고 싶어지지 않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사진=영화 ‘히어애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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