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림, 왜 ‘인맥 여왕’인가 했더니..

“라디오 작은 코너에 출연하던 신인시절이었는데요. 한 겨울에 폭설이 내려 집에 갈 길이 막막했어요. 집이 벽제였거든요. 그런데 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조연출 오빠가 지나가다가 ‘너 왜 거기 서 있어?’하고 묻더라고요. 그러더니 자기 집은 장흥이라며 타라고 하시는 거예요. 구세주를 만난 거잖아요. 한 시간 넘게 떨고 있다가. 가는 길이지 싶어서 차를 얻어 탔는데 나중에 라디오 작가 언니에게 들어 보니 동부이촌동 토박이셨어요. 제가 부담스러울까봐 그러셨던 거죠. 그 순간 뭐에 한 대 딱 맞은 것 같은 거예요. 그 후부터 제가 받은 고마움을 다른 누군가에게 똑 같이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 tvN <스타특강쇼>에서 박경림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나는 KBS2 <이야기쇼 두드림>이나 tvN <스타특강쇼> 같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두 프로그램 모두 매회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인데 그 시간에 초빙된 강사가 멘토로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대상은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 청춘들이지만 이미 만개하다 못해 시드는 쪽으로 발을 내딛은 나에게도 반성의 기회가 되는 등 이래저래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주 <스타특강쇼> 강사 박경림과 함께 했던 시간도 어김없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강의 주제는 ‘지금 불행하다면 감사하자’. 어쩌면 빤하다고 할 수 있는 주제였지만 소소한 에피소드들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가족의 의미도 되새겨 볼 수 있었고 또한 타인에 대한 배려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박경림’하면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슨 까닭인지 에서 유재석과 함께 마치 건전지 광고 모양 미친 듯이 춤을 추던 장면이 떠오른다. 지치도록 노력하는 뜨거운 삶, 어떤 때는 그 열정적인 에너지가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냥 살살 장애물을 피해가며, 날아오는 위험을 요리조리 막아가며 방어적으로 살아온 나와는 코드가 좀 안 맞는다고 할까? 그런데 방송을 보고 나니 왜 그녀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던 무렵부터 그토록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물론 스스로를 위한 노력이기도 하겠지만 부모님을 위한 마음도 크지 않았을까?

우리의 하루하루가 아무리 고난의 연속이라 한들 실제로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만이야 할까. 월남전에서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끔찍한 일들을 겪고 돌아오신 후 그녀의 아버지는 술 없이는 잠을 이루시지 못했던 모양이다. 밤이면 밤마다 아버지의 주사가 이어졌고 어린 마음에 그렇게 아버지가 싫고 미울 수가 없었다는데,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왜 그렇게 술을 드시는지, 왜 평소에는 무골호인인 어른이 술만 드시면 온 가족을 공포로 모는지 물었다고 한다. 혼쭐이 나도 좋다는 배짱이었으나 아버지는 의외로 혼을 내시기는커녕 선선히 자신이 처한 괴로운 상황을 털어놓으며 어린 딸에게 사과를 하셨다고.

그리고 딸이 ‘돌발소녀’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자 혹여 자식에게 누가 될까 두려워 그 즉시 술을 끊으셨다는 그녀의 아버지. 그녀가 서글픈 가족사를 꺼내며 청춘에게 전하고 싶었던 조언은 ‘미운 사람이 있다면, 나와 달라서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얘기였다. "내가 딸인데, 같이 사는 가족의 아픔도 몰랐는데, 내가 감히 누구를 오해하고 미워하겠냐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20년 동안 아빠의 고통도 몰랐던 딸인데." 눈물 많은 그녀는 당연히 울었고, 청중도 울고, 나도 따라 울었다.







가족사를 넘어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가 아닌가. 엄연히 월남전 파병용사들이 존재하고 아직도 부상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무수히 많지만 모두가 잊고 싶어 밀쳐놓는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그러나 방송 후 다음 날 쏟아져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술주정, 공포의 나날, 눈물의 어린 시절’을 강조한 제목들을 달고 있었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 셈이 아닌가.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금주를 선언하고 봉사활동에 전념하며 지내신다는 그녀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실지, 짐작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떻게든 관심을 유도해야 하는 생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리고 제목을 붙이는 게 글을 쓴 당사자가 아닐 경우도 많다는 것도 잘 알지만 이럴 때는 내가 다 미안해진다.

사실 강의 내용 중 가슴에 가장 와 닿았던 얘기는 그녀가 데뷔 즈음 겪었다는 일화다. 여의도 MBC에서 방송을 마친 늦은 밤, 폭설로 택시조차 잡히지 않는 난감한 상황, 프로그램을 함께 하는 조연출이 그녀를 발견하고 차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더라나. 그녀의 집은 벽제, 그의 집은 장흥. 마침 짠 듯이 코스도 맞는지라 부담 없이 신세를 질 수 있었다는데, 훗날 알고 보니 그 조연출의 집은 동부이촌동이었다고. 여의도에서 동부이촌동은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가 아닌가.

그에 비해 눈 오는 날 벽제까지 다녀오려면 세 시간은 족히 걸렸지 싶다. 당시만 해도 미래가 불투명한 일개 출연자에 불과했으니 그는 한 점 사심 없이 딱한 마음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혹여 미안해할까 봐 집이 장흥이라고 둘러대기까지 하며. 그런 일이 일상다반사였던지 본인은 그때의 일을 까맣게 잊었지만 그녀는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고 어떻게든 그 마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애를 써왔다고 한다.

배려나 양보가 점점 사라지는 요즘,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아쉬운 요즘인지라 그녀와 지금은 소속사 대표가 되었다는 조연출 청년과의 인연이 유달리 마음을 파고들었다. 누구나 살면서 앞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그 손길은 바이러스처럼 온 세상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이 둘의 인연처럼 말이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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