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내리는 남산을 맨발로 달리다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비 좀 내리면 어때요? 맨발인데.”

일요일,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비가 그치지 않아 남산 달린다는 계획을 접어야겠다고 말하자 박 부장이 이렇게 말하며 내게 용기를 줬다.

오후 여섯시 반 무렵. 비를 맞으면서 남산 숲길을 달리기로 작정했다. 충무로에서 남산순환버스 2번을 탔다. 국립극장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바지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바지 속에는 반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모자부터 티셔츠, 신발은 집을 나설 때 이미 달리기 용으로 착용했다.

남산. 충무로 인근에서 근무하면서 얻은 망외 소득이다. 이전에는 남산은 내게 남산타워로만 존재했다. 회사를 이쪽으로 옮긴 뒤 점심 약속이 없는 날이면 가끔 순환버스에 몸을 싣고 녹음에 마음을 풀어놓았다. 식사는 남산도서관에서 간단히 때우고 서가 옆 책상에서 여백의 시간을 가졌다.

남산 북쪽 산책로를 택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된다. 오르막에서는 무자위(물자새)를 밟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릴 때 논에서 무자위로 물을 퍼올리는 걸 보고 무척 해보고 싶었는데….

비는 계속 내리지만 몸이 젖을 정도는 아니다. 바람이 별로 없어, 비는 수직으로 떨어지고, 모자가 그 비 가운데 상당 부분을 튕겨내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비와 함께 흘러내린다.

이 좋은 숲길인데 사람이 별로 없다. 비가 내린다고 하지만, 이처럼 일부만 누리기에는 길이 너무 좋다. 이런 생각에 앞에서 오는 사람들을 무관심한 척 하면서 유심히 살핀다. 어, 동국대 윤 교수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산책 중이다. “윤 교수님!” 답변이 없다. 더 크게 부른다.

윤 교수가 놀란다. “어떻게 알아봤느냐”면서. “연구실에 있다가 산책 나왔다”고 말한다.

“내가 달릴 뿐 아니라 맨발로 달린다고 얘기했나?”

“응, 저번에 말했지.”

“비 내리는데 맨발로까지 뛰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신발을 벗지 않았는데, 이제 벗어야겠다.”

신발을 배낭에 넣는다. 조만간 점심 때 한번 보기로 하고 이젠 맨발로 달린다.

전망 좋은 자리에 ‘목멱산방’이 있다. 한옥 음식점이다. 숙박도 함께 하면 참 좋겠다.

북쪽 산책로 끝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돌아올 때는 몸이 한결 가뿐하다. 이 좋은 맨발을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맨발로 산책하는 아주머니한테 말을 건넨다.

“맨발, 좋습니다.”

한 박자 지나서 “네”하는 답변이 돌아온다.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이번엔 순환버스를 따라 남쪽 산책로를 따라 오른다. 남산타워 언저리까지 달렸다. 그 다음 가파른 내리막은 걸었다. 한참 걷는데 호리호리한 외국인이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남산도서관에 이르기 전 중간에 샛길로 내려왔다. 3호터널 남쪽으로 걸어왔다. 버스정류장에 서니 저녁 여덟시 40분. 버스를 타고 조금 가다 한강 다리 전에 내렸다. 한강 다리를 뛰어서 건넜다.

샤워하면서 궁리한다. 약속 없는 저녁에 종종 달려서 퇴근해야겠다. 그렇게 하려면 출근 길에 반바지와 러닝화를 배낭에 넣어 나오고….

서울 남산은 뉴욕 센트럴파크 못지 않은 공간이라고 본다. 호수가 없고 길이 몇 갈래 뿐이지만 숲 속이라는 점에서는 센트럴파크가 절대 따라오지 못한다. 남산을 세계적으로 이름난 산책·달리기·하이킹 공원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백우진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smitten@naver.com


[사진=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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