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답하라 1997>,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네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집안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매번 ‘내가 소싯적에 이랬느니, 쟤가 어릴 때 저랬느니’, 어르신들의 회고담을 질리도록 들어야 한다. 그래서 거짓말 안 보태고 백번 넘게 들은 얘기도 있다. 동창 모임도 마찬가지다. 인기 폭발이었던 총각 선생님 얘기, 또 반대로 진상이었던 선생님 얘기, 교담 너머로 아이스크림 사먹던 얘기며 단체로 땡땡이 쳤던 얘기들이 만날 때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추억이란 게 그런 거다. 그 시절의 소리, 냄새, 지금보다는 훨씬 어리바리하면서도 순수했던 사람들, 촌스럽지만 왠지 정이 가는 물건들, 다시 자꾸만 꺼내보고 싶은 것,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MBC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세시봉 특집’이 화제를 모았던 이유이고 드라마 <빛과 그림자>가 주목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써니>와 <건축학개론>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고.

tvN <응답하라 1997>의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비슷비슷한 과거로의 회귀 본능과 아날로그적 감성을 건드리는 콘셉트려니 했다. 거기에 1 세대 아이돌 젝스키스의 은지원과 H.O.T의 토니를 직접 출연시켜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열혈 소녀 팬들의 추억을 담보로 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추억팔이’로는 확실한 성공이지 싶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녀들의 마음은 동방신기를 거쳐 샤이니나 인피니트로 옮겨갔을지언정 우비며 풍선, 입금증 같은 소소한 것들과 다시 만나는 재미가 꽤 쏠쏠할 테니까.

그런데 프롤로그 식으로 방송된 0화부터 시작해 4화에 이른 지금, 그 시절 어정쩡한 구경꾼의 위치였던 나조차 추억에 젖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럴진대 등장인물들과 같은 또래는 오죽할꼬. 삐삐, DDR, 다마고치, PC 통신 등 그 시절 그 때를 재현하는 방식이 어찌나 디테일한지 ‘맞아, 맞아, 그랬지’, 감탄을 하며 빠져들게 된다. 주인공 성시원(정은지)이 방송 작가로 나오는지라 혹시 작가의 분신이 아닐까 했는데 듣자니 실제로 작가 중 한 사람이 토니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역시 실전 경험이 최고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캐릭터들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모든 인물들이 에피소드들 속에서 하나하나 단단히 이어져 누구 한 사람 소중하지 않은 캐릭터가 없다. 사실 출연자 면면을 처음 접하고는 걱정이 앞섰었다. 고교 동창으로 나오는 여섯 명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는데 믿음이 가는, 검증된 연기자가 방성재 역의 이시언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보니 그야말로 쓸데없는 오지랖이었지 뭔가. 우선 주인공 시원 역의 정은지의 생활 연기가 더 없이 발군이다. 털털하고 발랄한 여학생 캐릭터를 기존의 연기자들이 맡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풋풋하고 생동감 있는 매력이 돋보인다.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던 에이핑크의 은지가 이렇게 잘해낼 줄이야!

그리고 내 눈이 의심스러웠던 부분은, 서인국이 본래 이렇게 멋있었던가? 얼마 전 KBS2 <사랑비>에서 연기력을 입증한 바 있지만 그땐 이 정도로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영화 <건축학개론>의 납뜩이 조정석이 MBC <더 킹 투하츠>의 은시경 역으로 재발견된 느낌이랄까? 재발견으로 치면 윤윤제(서인국)의 형으로 등장하는 송종호도 못지않다. 다정하고 애잔한 느낌, 그간 꽤 여러 작품을 통해 그를 만나왔지만 연기자 송종호에게서 그런 아련한 눈빛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인피니트의 랩퍼 호야의 변신도 기특하고 기대 이상으로 존재감을 확인시켜 준 은지원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유정(신소율)이를 비롯한 학교 친구들, 시원이 부모님(성동일, 이일화), 시원이 언니 송주(김예원), 또 진짜 토니 역의 토니까지, 모두모두 극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악역이 없어도, 막장 진행이 아니어도, 본부장님 하나 등장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러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줄 수 있음을 증명한 드라마. 작가와 연출, 음악, 배우, 뭐 하나 부족한 점이 없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7> 같은 드라마가 내 생전에 나와 줘서 반갑고 고맙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그림 정덕주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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