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배들은 1948년 부산에서 배를 타고 네덜란드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여기 런던에 올 때까지 무려 20일을 걸려서 왔습니다. 이런 선배들의 어려움과 수고와 땀이 발판이 되어서 긴 시간이 지난 2012년 이 시점에 우리 후배 선수들이 이 런던 현장에서 선배들의 발판 위에 금자탑을 쌓기 위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 런던 올림픽 축구 영국과의 경기에서 해설자 차범근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대한민국 축구가 축구 종주국 영국을 꺾고 당당히 올림픽 4강에 올랐다. 내 평생에 마주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상황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수영이나 피겨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따게 된 것도 신기하지만 늘 아쉬움만 남기던 축구가 이토록 사람을 놀라게 할 줄이야. 하도 놀라 눈을 비비고 또 비비며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했다. 그러다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홍명보 감독의 얼굴에 웃음이 어린 장면을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2002년 월드컵 스페인 전 때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후 활짝 웃으며 달려오던 홍명보 선수의 벅찬 표정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지 뭔가. 감격에 겨워 연신 눈물을 닦고 있는 카메라맨을 보니 내 눈시울 또한 뜨거워졌다. 스포츠를 이용해 애국심을 조장한다느니 강요한다느니 말들이 많으나 이처럼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이 무에 나쁘단 말인가.

2002년 월드컵 적에도 4강에 올랐지만 그때는 온 나라를 붉게 물들였던 열화와 같은 국민들의 응원, 그 에너지 덕이려니 했다. 그런데 운명처럼 64년 만에 다시 밟은 런던 땅에서 이 무슨 기적 같은 일이냔 말이다. 해설을 맡은 차범근 해설위원도 기성용 선수의 승부차기 성공으로 4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선배들의 수고와 땀을 기억하자며 목이 메어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슴 뭉클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1948년, ‘조선’이라는 국호로 참가했던 제 14회 런던 올림픽. 온전한 독립국가가 되기도 전이어서 참가 자체만으로도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는데, 올림픽 복권을 팔아 겨우 마련한 돈을 여비 삼아 서울역을 떠나 부산, 후쿠오카, 요코하마, 상해, 홍콩, 방콕, 캘커타, 봄베이, 카이로, 로마,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하기까지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갈아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지난한 여정이었다고 한다. 교통편이 그러했을진대 뭘 변변히 챙겨 먹었겠으며 뭐 하나를 제대로 배우고 가르쳤겠는가.




그토록 열악한 처지임에도 역도와 권투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뤄냈지만 국내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나? 예나 지금이나 해준 것보다 바라는 게 크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더욱이 축구의 경우 멕시코에게 3:5로, 스웨덴에게 0:12로 연달아 패배하는 바람에 뭇매를 맞았었다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길고 긴 시간 차멀미에 뱃멀미에 시달려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출전했을 당시 선수들,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내심 얼마나 억울했을까.

다행인 건 오늘 새벽 강호 브라질에게 0:3으로 패해 결승행이 무산됐지만 국민들의 반응이 그만하면 잘했다며 격려하는 쪽이라는 점. 선수들의 실력만 일취월장한 것이 아니라 스포츠를 대하는 국민들의 자세 역시 진일보했지 싶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첫 출전인 14회 런던 올림픽 이후 수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에 임하는 동안 이길 때도 있었고 패할 때도 있었으나 그들의 땀과 노력이 한 켜 한 켜 쌓여 지금과 같은 실력을 갖추게 된 게 아니겠나.

앞으로 남은 숙적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 결과 여부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싸워준 감독과 코치,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의 박수를 보내줬으면 좋겠다. 부모가 자식 바라보는 넉넉한 마음으로. 그러나 이왕이면 이겨야지!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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