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인의 편린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한 사람의 회고록은 그 사람만의 회고록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린 자신과 여러 사람의 집단초상이자, 시대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5·16 주체 중 한 사람으로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3선 의원), 한국유도회장, 헌정회장 등을 역임한 장경순(90)의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는 회고록을 이런 측면에서 읽었다. 절대 권력자의 시대, 제도가 덜 갖춰진 사회의 기록이 생생하다.

이 회고록에서 박태준과 관련한 삽화가 눈에 띈다.

장경순은 1960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의 교육처장(준장)이었다. 당시 군은 예산편성 권한이 없었다. 예산편성은 전적으로 미국 군사고문관의 몫이었고, 한국 군은 집행할 뿐이었다. 장경순 처장은 그래서 시간 낭비일 뿐인 예산심의회의에 불참했다.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미국 군사고문관에게 불합리함을 지적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각 군별로 비율을 정해 예산을 지급하고, 각 군이 그 비율 대로 받은 예산을 자체적으로 편성해 집행토록 하면 된다.”

이 주장에 동조한 고문관은 고문단장에게 같은 얘기를 꺼냈다가 고문단장에게 찍혔다. 고문단장은 고문관에게 긴급 전속 명령을 내렸다. 긴급 전속 명령이 떨어지면 사나흘 안에 새 임지로 떠나야 한다.

소식을 들은 장 처장은 고문관에게 미안해졌다. 긴급 전속 명령을 받으면 고과가 깎인다. 장 처장은 가점으로 상쇄해주는 방안으로 훈장을 생각한다.

‘사나흘 안에 무슨 수로 훈장을 주나. 작전참모부장, 인사참모부장, 참모총장, 국방부장관으로 단계를 밟아 상신해야 하는데.’

국방부 상훈 업무 담당 과장을 찾아갔다. 초면의 박태준 대령이 앉아 있었다.

“예산이 이렇게 편성돼서야 육군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부터 시작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박 대령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서랍에서 을지무공훈장을 꺼내 건넸다.

“시일이 촉박하니 그냥 훈장을 주고 공적서는 나중에 제출하라”고 말했다.

장 처장은 ‘이 사람 장차 큰 일을 할 사람이구나’하고 탄복했다.

‘초면의 내게, 일이 잘못 꼬이면 불똥이 자기에게 떨어질 텐데. 배짱이 두둑하고 크구나.

장 처장은 친분이 있는 코리아헤럴드에 상훈 기사를 내도록 한 뒤 고문관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그 다음에 박 대령에게 공적서를 제출했다.

박태준에게 이 일은 아마 기억 밖으로 밀려났을 게다. 박태준을 ‘주어’로 한 책에는 이 일화가 나오지 않을 듯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로 내가 기억되는 때가 있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smitten@naver.com


[사진=<철강왕 박태준 경영이야기>, 서갑경, 한언, 2011]
[자료=<나는 아직 멈출 수 없다>, 장경순, 오늘,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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