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살인범이다>로 본 한국 복수극의 문제점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종종 개봉예정 영화들의 리스트를 보면서 '앞으로 이 영화들을 어떻게 견디나'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나에겐 바로 며칠 전이 그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 걱정 속에 살아야 할 것 같다. 여러분이라도 <비정한 도시>, <내가 살인범이다>, <남영동 1985>, <돈 크라이 마미>, <공정사회>같은 제목을 단 영화들을 순서대로 봐야한다면 꿈자리가 싱숭생숭하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나는 절반은 넘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결과를 보면 다들 그렇게까지 견디기 힘든 영화들은 아니었다. <비정한 도시>는 낮은 완성도 때문에 누구에게도 대단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고, <남영동 1985>은 여전히 견디기 힘든 영화였지만, 그래도 육체적 고통을 포르노처럼 그리는 류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살인범이다>는 예상 외로 편안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장르영화였다.

위의 문장만 대충 읽는다면 세 편의 영화들 중 가장 호평을 받은 건 <내가 살인범이다>처럼 보인다. 일단 재미있는 오락영화라는 게 나쁜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 편 중 내가 가장 실망했던 작품이 바로 <내가 살인범이다>이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견디기 힘든 소재로부터 시작한다. 10명의 여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살인범이 공소시효가 끝난 2007년에 회고록을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잘생긴 외모 때문에 미디어 스타가 된다.

이런 이야기는 마땅히 불쾌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고통 속에서 죽었고 살인범은 아무런 법적 제재 없이 돌아다닌다. 무언가 심하게 잘못되었고 여러분은 그 부당함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게 바로 이 이야기의 존재이유이다.

<내가 살인범이다>가 실망스러운 것은 이런 불쾌함을 제대로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 도입부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눈치채기 마련이다. 감독이 페어플레이를 하기 위해 드러나는 단서들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뿌려놨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이 끝에 밝히는 진짜 이야기는 드러나 있는 이야기보다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여기에 거의 개콘스러운 코미디에 서커스 같은 액션까지 섞어놨으니 영화는 보기 편하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끔찍한 소재가 아니라 인터넷 포털 댓글란을 보는 것 같은 여성묘사이다.

물론 코미디는 어떤 끔찍한 소재이건 다룰 수 있다. 큐브릭은 심지어 핵전쟁과 인류의 멸망도 코미디 소재로 삼지 않았던가. 하지만 모든 코미디가 모든 소재에 다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의미와 형식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하다.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코미디는 스스로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여기서 코미디는 진지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농담 대부분은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내용과 주제가 너무 무거우니 분위기를 살리는 막간극 역할인 것이다. 관객들이 재미없어하고 불쾌해할까봐 영화는 자기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기둥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액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도입부의 추격전 같은 것은 훌륭하다. 하지만 중반의 납치소동과 같은 것은 주제와 상관없는 액션의 유희에 지나치게 정신이 팔려 경박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소동극 속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 열 명의 사람에 대한 기억은 점점 손상을 입는다.

이런 것들은 겉가지다. 하지만 그것들을 걷어내고 없는 척 한다고 해도 <내가 살인범이다>의 입장은 미심쩍다.



다시 한 번 주제로 가보자. 영화는 기본적으로 추리극이다. 공소시효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살인범을 어떻게 하면 법정에 세울 것인가. 이 영화가 카타르시스를 최대화하려면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런 결말을 만들어낼 만큼 영리하거나 법에 밝지 못한 것이다. 결국 막판에 답을 하나 내긴 하는데, 그건 그냥 안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이를 건성으로 다루는 건 다른 주제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적복수이다. 그리고 그 그늘 밑을 보면 사형제에 대한 감정적 옹호가 숨어 있는 것이 보일 거다.

사적복수라는 소재를 다루는 건 잘못이 아니다. 좋은 복수극 영화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심지어 당당하게 옹호해도 상관없다. 불법이긴 하지만 의견의 자유는 언제나 존중되어야 하니까. 그건 밑에 숨어있는 사형제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어도 진지한 영화라면 이를 소재나 주제로 삼기 전에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는 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내가 주제에 대한 이 영화의 진지함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건, 살인범이 별다른 고통 없이 퇴장했을 때였다. 이 정도로는 내 사디즘이 전혀 충족될 수 없었다. 사형제나 사법제도에 대한 원론적인 의견을 떠나, 평범하고 단순한 관객으로서 나는 이 살인범이 10명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17년 이상 겪었던 고통을 모두 겪고 가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화의 형식적인 처벌은 너무 가벼웠다. 그건 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오로지 폭력과 죽음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사고만을 가지고 있었고 정작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살인범 자신도 포함시킨다. 이 말은 물론 영화가 살인범에게 충분히 고통을 주지 못했으며 심지어 제대로 패배감을 주지도 못했음을 의미한다. 웃기는 건 적어도 후자는 공소시효 추리극의 틀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설치다가 그 기회마저도 날려버렸으니!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이것이 한국 복수극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것은 복수자들의 문제점이다. 너무나 자기 위주여서 복수대상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상상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예로 나는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의 주인공을 주로 예로 든다.

일단 <아저씨>를 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이 복수자로서 무능한 이유는 영화 속 모든 행동이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어린 소녀를 구출해도 모자라는 아까운 시간에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장면이 대표적이겠지만, 복수의 행위를 예로 든다면 마지막에 최종악당을 처단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처벌을 못한다. 악당이 죽기 직전까지 패배의 감정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악당이 방탄창 안에 있다고 우쭐거리는 시간과 총에 맞아 죽는 시간 사이에 몇 초가 존재하는지를 세어보라. 그 짧은 시간이 주인공이 악당에게 가한 처벌의 시간이다. 냉철하게 총으로 창문을 쏘아대는 자신의 모습에 취한 나머지 자신이 총을 쏘아대는 행위가 처벌이라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것이다. 죽음? 그건 처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지 않는가.



<아저씨>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면 <악마를 보았다>의 주인공은 한심한 계산착고에 빠져 있다. 그는 살인범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겠다고 생각은 한다.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 하지만 그는 희생자들이 겪은 공포와 고통을 같은 방식으로 살인자에게 돌려주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희생자들과 살인마 사이에는 그런 식의 대칭성은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살인마는 희생자와 전혀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진 존재이고 그런 식으로는 그의 마음과 육체에 대단한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던 거다. 결국 그의 복수도 엄청난 민폐를 끼치며 실패한다. 살인자가 죽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의기양양했는지 기억해보라. 솔직히 난 그 이후 몇 초간 진행된 복수가 그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도 안 믿는다.

점점 내 이야기는 이상해진다. 지금 나는 사형제도나 사적복수에 반대하는 리버럴인 척 이야기를 꺼냈으면서 영화 속 악당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고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복수나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 모두가 공감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야기는 어느 정도 풀린다. 공감능력은 이타적인 행동에도 중요하지만 남에게 고통과 공포를 주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것도 못하는 건 그냥 폭력기계일뿐이다. 물론 그들은 형편없는 복수자들이며, 영화에도 나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복수자들과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허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남영동1985>를 보라. (후자는 그러라고 만든 영화가 절대로 아니지만) 그리고 한 번 비교해보라. 과연 이런 식의 복수행위가 전두환 정권 때 남영동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겪었던 공포와 고통의 100분의 1이라도 주는가?

좋은 예들이 있다. 모든 복수극의 모범인 <몬테 크리스토 백작>만 해도 그렇다. 백작의 복수가 성공적인 것은 그가 잔인무도한 육체적 고문을 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것이 복수대상에게 최대한의 심정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락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일단 그 단계까지 가야 복수 이야기는 다음 단계까지 갈 수 있다. 그래야 복수 과정의 의미를 곱씹게 되고 그 무의미함과 위험성을 체험하고 그 과정이 자신을 얼마나 황량하게 만드는 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난 최근 나온 한국 영화들 중엔 곧 개봉될 이송희일의 게이 로맨스 <백야>만큼 이를 효율적으로 보여준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복수 이야기는 서브 플롯에 불과하지만 복수 행위의 쾌락에서부터 그 집착이 낳은 부작용까지 부족함이 없이 담고 있다. 심지어 복수의 쾌락만 봐도 <내가 살인범이다>는 이 작은 아트하우스 소품에 밀린다.)

고로... 일단 영화 속에서라도 제대로 복수를 해보자. 그리고 그에 대해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폭력 속에서 잃어버렸던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되찾는 아이러니컬한 방법일 수도 있다. 거기까지 못 간다고 해도 적어도 속은 제대로 풀릴 것이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주인공과 같은 태도로는 어느 쪽도 가지 못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복수'의 결과란 살인마에게 수십 년의 시간을 면제시켜주고 그들 자신은 살인마가 겪었던 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무감각 상태에 가두는 것뿐이다. 물론 몸 다치고 고생한 건 몽땅 주인공들. 이처럼 밑지는 장사가 또 있을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내가 살인범이다>,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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