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 싶다>, 역사는 어떻게 반복되는가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것에는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을 것이다. 시청자들로부터 폭넓게 사랑받는 섭외 1순위의 스타들이 대개 그 또래인데다, 캐릭터 설정에도 무난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사회초년생 티를 벗고 나름 기반도 잡았으나 미혼이라. 수많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낳을 수 있는데다 실제로 숱한 이야기들이 이 연령대의 캐릭터들에서 나왔다.

헌데 이 또래 인물들에게 ‘대단한 이유’를 부여하는 드라마들을 만날 때가 있다. 특히 2000년대 후반 이후의 이야기로,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식은 세대론에 가깝다. 이를테면 올 상반기에 방영된 <적도의 남자>의 경우. 선대의 죄를 고스란히 짊어진 세 남녀의 이야기는 그들의 학창시절이었던 90년대 후반에서 시작되며, 당시의 분위기는 IMF 사태 직후의 흉흉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비록 복수극일지언정 드라마는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 모두에게 연민어린 시선을 줄곧 견지한 바 있는데, 이들 세대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태도는 전작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적도의 남자>와는 거울쌍둥이 격인 <태양의 여자>는 물론이요, 코믹 드라마였던 <메리 대구 공방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MBC의 새 수목 미니시리즈 <보고 싶다>의 통절한 멜로도, 기본적으로 이처럼 세대론적인 접근을 바탕에 두고 있다. 유력 금융기관 총수의 자제인 한정우(여진구)는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이자 오명을 쓴 동급생 이수연(김소현)과 첫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아버지의 한없는 물욕은 하나뿐인 아들 정우가 납치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고, 역시 하나뿐인 친구를 구하려던 수연도 함께 납치된다.

친구를 구하려다 오히려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는 수연.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정우는 그녀를 버리고 홀로 도망친다. 이후 수연의 종적은 묘연해지고, 뒤늦게 친구를 구해달라고 울면서 매달리는 정우에게 그의 아버지는 말한다. 수연이 잘못된다면 그건 너의 책임이라고.

한 번의 실수로 기약 없이 헤어진 연인, 그리고 뼛속 깊은 죄의식과 함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멜로 플롯 중 하나다. 하지만 <보고 싶다>에서 주목할 것은 그 죄의식의 이유다.



이러한 플롯을 고스란히 따랐던 영화 <그해 여름>(2006)과 비교해 보자. 유력인사의 자제인 대학생 윤석영(이병헌)은 농촌봉사활동을 갔던 마을에서 월북자의 딸인 서정인(수애)과 사랑에 빠진다. 농활이 끝난 후에도 쭉 함께하기로 한 두 사람은 같이 서울로 올라오는데, 학교에 잠시 들른 사이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시작된다. 시위행렬에 휘말린 두 사람도 경찰에 체포되고, 대질심문이 있던 자리에서 석영은 월북자의 딸인 정인과의 관계를 부정한다. 홀로 풀려나온 석영은 뒤늦게 아버지에게 정인을 빼내달라며 무릎을 꿇고 사정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너 때문에 걔가 거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두 작품이 가진 플롯의 유사성이 아니다. 결국 이것은 청춘들에게 죄의식을 전가했던 시대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보고 싶다>는 그들 세대에 대한 연민을 넘어 사랑하는 이 앞에서 비겁자가 되게 만드는 세태를 직시하는 드라마다. 정우와 수연이 처음 만났던 때도 1998년. IMF 사태가 할퀴고 지나간 나라에 남은 것은 정우 일가의 추악한 탐욕이 보여주듯, 돈에 대한 맹신이었다.

<그해 여름>의 배경인 1969년 당시 집권 연장을 꿈꾸던 탐욕적인 정치권력은 30여년 후인 1998년 <보고 싶다>에 이르러 막강한 금권으로 대체되었다. 이 드라마 속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무력하기만 한 상황. 말하자면, 그 30년 사이 그 실체만이 바뀌었을 뿐, 청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비겁자로 만드는 행태는 변하지 않은 셈이다.



소름끼치는 어폐는, 후세대에게 책임을 일갈하는 아버지들에 있다. 정우를 납치하고 수연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자들은 정혜미(김선경)의 사주를 받은 납치범들이지만, 그 죄의 원천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우의 아버지 한태준(한진희)이다. 이면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길이 없는 정우는 결국 그 아버지의 힘에 기대 수연을 구하고자 한다. 자신을 비겁자로 만든 데다 모든 악의 원천인 아버지에게 다시금 의지하는 모습은, 금권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결국 그 권력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오늘날 청춘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영화 <그해 여름>이 나왔을 때만 해도, 이는 단지 회고담으로 족했다. 그러나 <보고 싶다>가 담고 있는 세태의 은유는 그저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탐욕은 더욱 거대해져만 가고, 굴레는 더욱 옥죄어만 오니 말이다. 끝내 정우는 이를 악 물고 그 굴레를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그가 복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가치는 탐욕의 대립항이 된다. 그리하여, 이미 예고 성격으로 삽입된 인서트 컷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듯, 이후 탐욕과 맞서야 하는 그가 행보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MBC, 영화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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