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우치>, TV라는 족자에 갇힌 도사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한 작품을 원작과 별개로 여겨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다만 달라진 부분을 바탕으로 각색자의 세계관을 읽는 것은 비평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도가 지나쳐 ‘이럴 거면 왜 원작을 끌어들였나?’라는 의구심이 드는 작품들마저 종종 만난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에서 그야말로 이름값만 빌려온 듯한 드라마 <전우치>도 그 중 하나다.

그러니까 아무리 제 2의 창작이라고 해도 원작의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각색을 선택했을 것인데, 드라마 <전우치>에서는 그 어떤 부분이 당최 아리송하다는 얘기다. 원작이 고전이자 구전이라 원체 다양한 판본들이 존재하는 만큼 스토리는 제쳐두고 캐릭터부터 살펴보자. 브리태니커 사전의 평가에 의하면 원작 <전우치전>은 ‘도술을 장난으로 여기며 자기만족에 그친 면이 있어 <홍길동전>에 비해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도술적인 행동묘사의 다양성과 정치부패의 고발이라는 점에서는 앞선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방점은 ‘장난’에 있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에서 주인공 전우치는 비록 가난한 백성들을 돕겠다는 행동의 동기를 품고 있긴 하나 그가 벌이는 기기묘묘한 행각들은 대부분 장난이다. 도술을 이용해 양반들을 농락하고, 짝사랑에 빠진 친구를 위해 과부를 보쌈하고, 심지어 임금까지 골탕 먹이다 위기에 몰리면 그림 속으로 숨어버린다. 어쩌면 이 장난스런 주인공 캐릭터가 원작이 가진 매력의 핵심이라 할 수도 있을 텐데, 이처럼 선과 악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고 성스러움과 음탕함이 뒤섞여 분방한 캐릭터를 흔히 ‘트릭스터’라 부른다. 그리고 전우치는 근대 이전 한국문학 초유의 트릭스터 캐릭터에 해당한다.

이토록 귀한 캐릭터가, 21세기의 텔레비전 드라마로 건너오면서는 대단히 시시해져 버렸다. 이 드라마에서 전우치(차태현)를 움직이는 동력은 1차적으로 율도국의 질서를 어지럽힌 마숙(김갑수), 마강림(이희준)의 음모를 저지하고, 연인 홍무연(유이)을 되찾겠다는 목표다. 하지만 적들의 음모는 곧 중종으로 추정되는 조선 임금의 이해관계와도 배치되는 것이니, 머지않아 전우치는 (결과적으로) 고립된 왕을 위해 싸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고전소설 버전에서 왕을 갖고 놀던 전우치가 왕에게 충성하게 되었다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다. 저 혼자 잘났던 망나니 도사가 대의명분이라는 족쇄에 발이 묶여버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텔레비전 사극의 강고한 룰에 꼼짝없이 포섭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코믹스 히어로처럼 율도국 도사 전우치와 조보소 기별서리 이치라는 두 개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것은 신선하다고도 볼 수 있으나 명분에 얽힌 설정은 이러한 캐릭터 전략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먼저 본 모습인 전우치로서의 주인공은 대체로 비분강개하기만 하다. 아이덴티티가 두 개라고 해서 굳이 성격마저 분리할 필요도 없고(이를테면 스파이더맨처럼) 늘 복수의 일념으로만 이글거릴 필요도 없을 텐데, 이 드라마로만 보자면 전우치라는 도사는 원래 진중한 인물이었으나 가짜 신분일 때만 망나니인 척하는 캐릭터일 게다.

그렇다면 가짜 신분 이치로서는 어떤가? 전략상 정체를 숨겨야 하는 고로 망나니짓도 한계가 있는 법. 거칠 것이 없는 원작의 전우치와는 달리 장난의 스케일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보니, 그가 벌이는 망나니짓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사소한 일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같은 원작을 공유하고 있는 영화 <전우치>도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인물이 가진 트릭스터의 아우라를 훼손하지는 않았다. 원작을 알고 영화도 본 시청자라면 이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거대한 스케일의 장난을 기대했겠지만, 명분은 장난의 발목을 잡았고 스케일은 엉뚱한 방식으로 커졌다.

고작 도사들이 슈퍼슬로우 화면에서 에네르기파 내지 파동권을 쏴대는 국적불명의 판타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이쯤 되면 굳이 <전우치>라는 이름 대신 오리지널 캐릭터들을 데리고 오리지널 스토리로 가도 문제가 없었거나 오히려 그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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