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영화의 전성기가 다시는 오지 않는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2,30년 전만 해도 크리스마스 때 공중파 방송에서 기독교 관련 영화를 틀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님 생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세속국가이고 종교는 당연히 그보다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조금 더 과거로 가면, 할리우드에서는 기독교 영화가 히트하던 때가 있었다. 5,60년대였다. <벤 허>가 가장 유명했고 <쿼바디스>도 있었다. <바라바>도 있었고 <성의>도 있었다. 미국인들은 이들을 당연한 것처럼 소비했고 그 당연함은 국내에 수입되었을 때 부록처럼 따라붙었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 사극 유행을 이용해 본전을 뽑으려는 유태인 제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뒤에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 영화의 유행이 불었던 때가 있었다. 7,80년대이다. 이장호의 <낮은 대로 임하소서>가 그 중 가장 유명하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사람의 아들>과 같은 영화들도 있었다. 아, <휴거>도 있었다. 이 영화를 기억하시려나?

지금은 어떨까? 할리우드에서 소위 기독교 영화는 주류의 영역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 오락물의 대부분은 케이블 종교 채널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우리가 뭐라고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전이 이상했다.

최근 들어 기독교 영화들이 슬슬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명>, <회복>, <잊혀진 가방>과 같은 기독교 주제 다큐멘터리들이 만들어졌고 미국에서 만들어진 극저예산 기독교 영화들이 몇 편 수입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 개봉한 <누나>는 기독교 영화제에서 사전지원을 받은 작품으로 어떻게 봐도 기독교 극영화이다.

<누나>는 <낮은 대로 임하소서>처럼 노골적인 포교 영화는 아니다. 교회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목사도 나오지 않으며, 선교용 대사도 없다. 대신 주인공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 신자가 등장하고, 기도의 행위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며, 마지막에 가면 주인공이 기독교인이 되거나 잃었던 믿음을 되찾는 것으로 나온다.

이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은 의도적이다. 만약에 지금과 같은 시대에 <낮은 대로 임하소서>와 같은 영화를 만든다면 그 작품은 비웃음과 놀림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당시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무심하게 그런 영화를 보고 나왔지만, 지금 관객들은 그러지 않는다. 당연히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접근법이 <누나>라는 영화를 더 나은 기독교 예술품으로 만들었는가? 나는 그게 의심스럽다. 실제로 나는 이 영화에 과연 종교가 개입될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 영화는 자기를 살리고 죽은 동생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여자가 동생 또래의 남자애에게 집착하며 그 아이에게 ‘누나’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인데, 주인공이 느끼는 죄책감과 고통은 지극히 기독교적이지만 정작 종교가 드러날 때는 이야기의 힘이 떨어져 버린다. 이런 종교적 영향은 자동적으로 기계장치의 신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단 드라마를 진행하려면 최종 책임은 당연히 주인공이 짊어져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부터 과연 기독교 영화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종교 영화가 과연 이전의 힘을 되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에게는 이 질문 자체가 넌센스처럼 보인다. 단테의 <신곡>과 같은 위대한 작품을 보자. 우리는 이를 기독교 문학으로 본다. 하지만 단테는 특별히 기독교 문학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저 그가 알거나 안다고 믿었던 세계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기독교 문화의 일부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신곡>은 그에게 종교문학보다는 SF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기독교 사상이나 문학이 위대할 때에는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때이다.

피튀기는 20세기에도 위대한 기독교 예술의 전통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주로 가톨릭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이 작품에서는 설교 같은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레이엄 그린이나 프랑수아 모리아크,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작품들을 보라. 그 책들의 주인공들은 종종 무신론자이거나 죄인이고 기독교가 금하는 일들을 가차 없이 저지른다. 신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고통이나 외로움을 특별히 줄이는 것도 아니다.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그런 인물들이 때문에 그 책들은 여전히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남는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독교 영화의 전통과 유행을 되살리려 하는 사람들은 이 둘 중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낮은 대로 임하소서> 같은 작품들이 주류 충무로 영화로 만들어졌고 비신자들이 그 영화들을 구경을 하러 왔던 옛날을 꿈꾸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옛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그건 이 나라의 역사가 이상한 방향으로 퇴보한다는 뜻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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