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베카>의 일등공신은 누구인가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2013년 핫 뮤지컬로 떠오른 <레베카>, 개막 전 부터 어떤 캐스팅을 보는 게 좋을 지 기자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다. 부유한 영국 상류층 신사인 주인공 ‘막심드윈터’역엔 배우 유준상, 오만석, 류정한 이렇게 총 3명, 또 다른 숨은 주인공 댄버스 부인 역에는 옥주현, 신영숙 등 2명의 배우가 캐스팅 됐기 때문이다.

공연을 많이 접하다 보면 대략 예상 스코어가 점쳐지기 마련인데, 이번 캐스팅은 직접 보지 않고선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유준상의 호소력 있는 따뜻함, 오만석의 완벽한 캐릭터 해석, 류정한의 캐릭터에 대한 촘촘한 해석을 시원한 성량에 담아내는 스페셜함이 떠올라 쉽사리 누구 편을 들기가 힘들 지경이 됐다.

옥주현과 신영숙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벳>을 기점으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뮤지컬 배우로서 실력을 인정받은 옥주현 캐스팅을 선택하자니, 완벽한 카리스마와 성량으로 남녀노소 뮤지컬 팬을 사로잡은 신영숙 배우 얼굴이 아른거렸다.

결론은 <레베카>를 세 번 이상 만나보는 것. 매일 밤 LG아트센터로 출근하며 직접 만나보니 장단점이 뚜렷이 보였다. 우울의 강도별로 표현하자면 유준상<오만석<류정한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영화같은 판타지를 즐기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따뜻한 막심을 원한다면 유준상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도의 도를 지키며 디테일한 표정변화에 높은 점수를 주는 세심한 관객이라면 오만석을, 이 남자의 트라우마까지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어머니의 마음을 지닌 관객이라면 류정한을 선택하는 게 좋겠다.

장동건, 송중기, 수지 등과 함께 CJ E&M에서 선정한 2012년 스타일아이콘으로 떠오른 유준상은 1막 초반에 들을 수 있는 ‘놀라운 평범함’이란 넘버가 다소 평이하게 들려 기대감이 살짝 낮아졌다. 반면 ‘나’와 체스를 두는 모습이나 사랑스럽게 키스를 나누는 모습에선 영국 신사의 이미지가 묻어나왔다. 또한, 무릎을 꿇을 듯 말듯 머뭇거리며 귀여운 소년으로 돌아가 구애하는 모습은 확실히 여심을 사로잡았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을 연상시키는 후반 장면을 그림처럼 살려낸 이 역시 유준상이었다.

<헤드윅>에서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최고의 티켓파워를 보였던 오만석은 막심의 대표 넘버로 6분이 넘게 이어지는 ‘칼날 같은 그 미소’에서 최고의 진가를 발휘했다. 이 장면 하나만을 보기 위해 오만석 캐스팅을 선택한 당신의 선택에 박수를 보낼 만했다. 이외 다른 대사를 뱉어나는 속도나 강도 역시 원작의 해석을 충실히 따른 듯 보였다.



<지킬 앤 하이드>, <몬테크리스토>, <맨 오브 라만차>, <두 도시 이야기> 등 초연 뮤지컬이 히트작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일등공신한 배우 류정한의 ‘막심’은 어땠나. 간단히 말하면, 우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막심’ 그 자체이다. ‘행복이란 단어’와 가장 거리감 멀게 느껴지는 인물에서 ‘맨덜리 가장무도회’에 나타난 ‘나’에게 화를 폭발하는 장면까지 입체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칼날 같은 그 미소’ 역시 오만석과는 결을 달리하며 자신만의 넘버로 표현해냈다. 그 결과 ‘막심’의 과거가 어때했는지 또 다른 단서를 쥐고 있는 누나 베아트리체(이정화)의 넘버를 더 세심하게 들어보고 싶게 만들었던 캐스팅이기도 했다.

2006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된 뮤지컬 <레베카>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과 앨프리드 히치콕의 동명 영화를 기반으로 한다. 사고로 죽은 전 부인 레베카의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사는 남자 ‘막심 드 윈터’와 죽은 레베카를 숭배하며 맨덜리 저택을 지배하는 집사 ‘댄버스 부인’, 맨덜리 저택의 새 안주인이자 댄버스 부인과 맞서는 ‘나(I)’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무거운 비밀과 음모 및 로맨스와 서스펜스가 결합된 스릴러 뮤지컬이다. <모차르트!>,<엘리자벳>을 작곡한 실베스터 르베이와 미하엘 쿤체 콤비가 만들었다.

<레베카>에서 ‘레베카’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레베카’의 존재를 자신의 발걸음, 손동작, 눈빛, 목소리로 불러내는 ‘댄버스 부인’이 극을 쥐락펴락 한다. 그 결과 관객은 ‘댄버스 부인’옆에는 항상 ‘레베카’(그림자)가 걸어나오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의리와 신념으로 똘똘 뭉친 ‘댄버스 부인’은 죽은 레베카의 환영과 함께 사는 여자임에도 말이다. 물론 배우가 그 역을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에 달려있다.



뮤지컬 속에선 오브제를 이용해 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냈다. 우선 영원한 생명 ‘난초’는 레베카의 분신으로 댄버스 부인의 광적인 행동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2막에서 ‘나’의 넘버 ‘미세스 드 윈터는 나야’가 불려 진 뒤 ‘난초’는 ‘진달래 꽃’으로 대체된다. ‘나’의 화사한 미래를 예감할 수 있게 만드는 ‘진달래 빛’(베이지 색 의상에서 바뀜) 의상 역시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댄버스 부인과 ‘나’의 심리전을 흥미롭게 바라보게 하는 지점이다. 또 하나의 오브제는 ‘큐피드 상’이다. ‘큐피드 상’은 ‘나’에 의해 두 번 깨진다. 한번은 우발적인 실수로 또 한번은 의도적으로 말이다. 댄버스 부인의 파국을 예상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다.

실제 등장하는 신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역은 단연 댄버스 부인이다. ‘옥버스’(옥주현 댄버스)는 마지막 ‘불타는 맨덜리’ 장면에서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를 푼다. 마치 <지킬 앤 하이드>의 통제불능 하이드를 연상시켰다. 눈빛 하나로 상대를 집어 삼킬 듯 몰아치는 기세는 단연 돋보였다. 물론 ‘신버스’(신영숙 댄버스)의 존재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우선 음역대가 이보다 적합한 배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맞는다.

‘옥버스’는 원래 톤보다 낮춰서 말하는 초반 대사신이 다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신버스’의 대사나 노래는 초반부터 귀에 편하게 들린다. 카리스마의 색도 달랐다. ‘옥버스’가 보다 광적인 내면을 표출해서 긴장감을 흐르게 한다면, ‘신버스’는 소리치지 않고서도 상대를 제압하는 미스터리한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둘 중 오싹한 이는 단연 후자다.



<레베카>는 익명의 내레이터 ‘나(I)’가 어젯밤 꿈속에서 본 멘덜리 저택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가 스케치북 위에 그리는 그림은 그대로 반투명막 위에 그려진 뒤 다시 무대와 일치하는 식으로 장면이 전환됐다. 이러한 장치는 ‘ 나’의 넘버 ‘행복을 병 속에 담는 법’과 어울리며 ‘나’와 ‘막심’ 그리고 ‘댄버스’의 히스토리를 그대로 무대 위에 복원시키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관객과의 정서교류층면에서도 긍정적 인상을 남겼다. 또한 정승호 디자이너는 ‘나’의 기억을 담은 여러 개의 상자를 오브제로 활용해 하나씩 조명하며 드라마를 전개하는 상징적인 무대기법, 레베카의 침실이 360도 회전하게 해 영화의 줌업 기능을 뮤지컬 무대에서 맛보게 만들었다.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여자 ‘나’(임혜영 김보경)는 1막과 2막의 색을 달리하며 이 작품이 ‘신데렐라’ 이야기로 전락하지 않게 중심을 잡아줬다. 주역들 외에도 조연들의 기량이 훌륭하다. ‘레베카’의 존재 앞에서 자꾸 작아져만 가는 ‘나’에게 적절한 조언을 건네는 집사 프랭크 역 배우 박완의 신뢰감 가는 목소리, 맨손으로 호두 까는 여자 ‘반 호프’역 배우 이경미 최나래의 호탕한 웃음과 유머, 벤 역 강민욱의 나날이 발전해 나가는 연기는 칭찬할만했다. 또한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잭 파벨 역의 최민철은 음산한 저음과 웃음으로 캐릭터에 힘을 실었다.

<레베카>를 최종 완성하는 앙상블 역 배우 18명은 제 몫을 톡톡히 했다. 특히 이번 작품은 전환 음악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주는 이는 쉴 새 없이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앙상블 배우들이다. 그래서 <레베카>의 일등공신은 18명의 앙상블 배우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3월 31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EMK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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