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라고요? 헤어지란 거예요? 부모 없는 알바생이라 싫으신 거예요? 엄마도 작은 어머니처럼 죽어도 안 된다 그러시는 거예요? 실망이에요 엄마. 좋아해요. 결혼하고 싶어요. 결혼해서 따뜻한 데서 살게 해주고 싶어요. 제가 보호자로 지켜주고 싶어요. 이 마음, 이거 하나면 됐지 다른 게 뭐가 필요해요?”

- JTBC <무자식 상팔자>에서 준기(이도영)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나는 ‘내 아이들 배우자감으로는 화목한 부모에게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심성 맑은 아이면 족하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건 정녕 진심이다. 돈이나 명예, 권력 따위를 쫓는다는 게, 집안이 어쩠느니 직업이 어쩠느니, 그런 걸 따진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잘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면서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일명 ‘사’자 직업의 사윗감을 은근히 기대하는 친구들을 내심 속물 취급하곤 했다. 어쩌면 묘한 우월 의식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니들 같은 속물이 아니야, 뭐 이런 식의.

그런데 ‘따뜻한 곳에서 살게, 보살펴주고 싶다’는 준기의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양 정신이 번쩍 들지 뭔가. 생각해보니 나 또한 속물이었던 것. 자랑스레 다른 조건 같은 건 없다고 큰소리 쳐왔지만 ‘부모 사랑 듬뿍 받은’보다 더한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부모 사랑 받고 못 받고는 아이 당사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본인의 노력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조건을 걸어 놓고 무에 그리 당당했을까.

양친부모 모두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 의지가지없이 떠도는 18살짜리 수미(손나은)와 결혼하겠다고 나선 철부지 막내아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며, 몇 년 뒤에 부모 있는 집에서 제대로 큰 스무 살 넘은 아이 데려오라며 펄펄뛰는 어머니 지애(김해숙)에게 준기(이도영)는 “엄만 다른 줄 알았어요. 엄마두 부모가 있구 없구, 가진 게 있구 없구 기준으로 사람 보시는 줄 몰랐어요.”라고 대든다. 눈물범벅인 얼굴로. 그 표정, 그 눈빛이 어찌나 진실 되던지 준기 어머니는 뒷목 잡고 넘어갈 모양새였지만 내 입에서는 “그래, 네 말이 맞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반성의 눈물인지 뭔지 나도 준기를 따라 울고 있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 아닌가. 부모 밑에서 사랑 받고 자란 아이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부모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딱한 한 아이에게 부모라는 울타리의 든든함을 느끼게 해준다면, 그게 몇 배는 더 좋은 일인 것을.



작은 집 희명(송승환)이네 며느리 효주(김민경)가 바로 그런 경우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혼하시고, 혈혈단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효주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기까지 심적 갈등이 심했던 시어머니 유정(임예진). 그녀는 효주의 ‘엄마’라는 호칭에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한다. 사실 대기(정준)네 내외가 부모님의 불화를 차마 두고 볼 수 없다며 당장에 짐을 싸들고 들어왔을 때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능력 있는 고아’를 남편감으로 바란다는 요즘 세상에 누가 시부모와 함께 살겠다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오리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부모님의 그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효주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지 싶다. 효주는 시어머니와 마치 모녀 사이처럼 툭탁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진다.

가족의 의미를 차차 알아가게 될 효주. “엄마가 그리워요. 마음에 안 드시는 딸로 생각해주세요. 그럼 어느 날부턴가 엄마의 외로움에 제가 도움이 될지 또 누가 알아요?” 효주가 가방과 함께 건넨 카드를 읽으며 남모래 눈물짓는 유정을 보고 있자니 수미에게도 하루라도 빨리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나에게도 이젠 ‘부모 밑에서 잘 자란’, 뭐 이런 조건은 사라졌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그저 내 자식이 소중하게 보살펴주고 싶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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