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 아픈 액션 러브 스토리 <베를린>
- <베를린>, 허울뿐인 이데올로기를 걷어치우다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악랄한 북한 보위부 요원 동명수(류승범)가 쳐놓은 덫에 걸려 궁지에 몰리게 된 표종성(하정우)과 련정희(전지현) 부부는 간신히 베를린 시내의 한 허름한 호텔로 몸을 숨긴다. 둘의 뒤는 동명수와 그의 수하만이 좇는 것이 아니다. 동명수의 이간질에 넘어간 아랍 테러 조직이 먼저 표종성을 죽이려고 안달이다. 그들은 표종성이 자신들의 형이자 보스를 죽였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지척에 있다. 너무 가깝다. 하지만 북한의 정예 특수요원이자 한때 공화국의 영웅 칭호를 받았던 표종성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급할 때는 등잔 밑에 숨어야 한다’는 것을. 문제는 그 같은 도주 비법을 표종성이 동명수에게 이미 가르쳐 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추격자들은 바로 호텔 문밖까지 와있다. 그러나 그 위급한 순간에도 련정희는 표종성을 용서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오기 전 남편이 자신을 의심하고, 당에 고발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련정희는 표종성의 가슴팎에 편지봉투 칼을 들이밀며 말한다. “여기까지야요. 이제 그만 저는 가겠시요.” 나가면 죽는다는 걸 아는 표종성은 그녀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말한다. “언제든지 날 죽이라우. 그러나 곌코 디금은 아니야.” 련정희의 손이 떨린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 남자. 내 남자. 그러나 너무 무정한 남자. 울음섞인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인다. “가혹한 게 뎐부가 아니라요!”

베일을 벗은 류승완 감독의 야심작 <베를린>은, 영화 내내 아드레날린이 치솟을 만큼의 가공할 전투적 액션과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는 총격신, 그리고 온통 정신을 뺏기게 될 추격의 서스펜스로 꽉 차 있다. 국내에서 최근 1~20년간 선보인 액션 스릴러 가운데 가히 최고봉이라 할 만한 작품이 탄생한 셈이다. 현존하는 감독 중에서 추격신을 가장 잘 찍는다는,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의 폴 그린그래스 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일 것이다.



<베를린>은 독일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격 액션 스릴러다. 표종성은 베를린을 근거로 제3국에 무기를 밀매하고 그 비밀자금을 북한에 송금하는 일을 한다. 련정희는 그의 아내로 대사관에서 통역 일을 한다. 표종성의 상관은 리학수 북한대사(이경영)다. 베를린 주재 한국 대사관 소속인 정진수(한석규)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무기 밀매 현장을 잡으려고 한다. 그런 이들 앞에 어느 날 북한 보위부 간부이자 한때 표종성과 특수요원 후배 격이었던 동명수가 찾아 온다.

동명수의 등장을 전후해 베를린의 남북 요원들간에는 수상한 일들이 속출한다. 표종성의 무기 거래 현장을 왜 모사드가 습격했을까. 그 동안 당성(黨性)을 인정받아 왔던 리학수 대사는 왜 갑자기 미국 대사관으로의 망명을 시도하는 것일까. 표종성의 아내 련정희가 숨기고 있는 사실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가 던지는 교묘한 퍼즐게임에 관객들은 서서히 빨려 들어가게 된다.

영화는 오프닝 장면부터 보는 사람들을 바짝 긴장시킨다. 표종성과 아랍 테러조직의 두목, 그리고 러시아 무기밀매상은 그들을 급습한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과 엄청난 총격 신을 벌인다. 그 네 측은 각각이 적이다. 어느 한쪽도 같은 편이 아니다. 한쪽을 쏘면 또 한쪽이 자기를 쏘고, 그 또 한쪽은 다른 한쪽으로부터 총격을 받는 식이다. 생사를 건 나홀로의 싸움. 화면은 온통 귀를 찢는 총성과 파편으로 점철되지만 전해지는 감정은 무참할 만큼 매우 비정하다. 과연 누가 여기서 살아남을 것인가.



영화 내내 이어지는 총격 액션 신은 이 분야에서 가장 실감나는 촬영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영화 <마이애미 바이스>의 마이클 만도 충분히 놀라게 할 만한 것이다. 마이클 만의 스트리트 총격 액션 신은 ‘가차없는’ 정서로 유명하다. 영화 <베를린>은 그 극치를 이룬다. 류승완 감독의 액션 연출 수준이 얼마만큼 스스로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액션영화를 독학으로 섭렵해 이제 거의 최고의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가깝게는 폴 그린그래스와 마이클 만, 오우삼과 쿠엔틴 타란티노, 멀게는 샘 페킨파에 이르기까지 류승완은 할리우드 액션감독들의 작품을 뛰어 넘어 자신이 그 대가 반열에 올랐음을 이번 작품을 통해 스스로 입증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베를린>의 성공적인 착지점은 그렇게 새로운 차원의 액션 스릴러 영화를 표방하는 척, 사실은 줄거리의 핵심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로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베를린>은 결코 액션영화가 아니다. <베를린>은 러브 스토리다!’ 그것도 절절한 멜로 드라마다. 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극력 숨기고 있었던 부분은 바로 그것이다. 사실 되새겨 보면 모든 것은 다 사랑 때문이다. 당성이니, 공화국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는 것이니, 그 따위 것들은 사실 모두 다 소용이 없다.

남한 요원 정진수도 늘 입버릇처럼 ‘빨갱이 새끼들 때문에’ 일을 한다고 떠들지만 결국 그가 선택하는 것도 자신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 된다. 영화 후반부, 기로에 서게 된 두 남자 표종성과 정진수는 죽게 될지도 모르는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대화를 나눈다. 정진수가 먼저 말한다. “니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표종성이 답한다. “난, 오히려 당신이 이해가 안 가오.” 사람들은 때론 이성적으로 답이 안 나오는 행동을 실천에 옮기는 법이다. 실존의 선택을 한다. 역사는 그 같은 주체들의 합이 이루어낸다.



류승완은 왜 베를린으로 갔을까. 왜 북한 내부의 기묘한 정치군사적 갈등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그가 그리려고 했던 것이 단순히 첩보원들의 비정한 세계였을까. 모든 관계가 얽히기 전, 북한대사 리학수는 오랫동안 은근히 동지애를 나눠 온 표종성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먹구름이 밀려 오는데, 비를 피할 곳이 없다”고. 류승완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렇게 어둠컴컴한 지경에 빠져 있는 지금의 세상에 대한 것이다. 백척간두에 서있는 사람들의 얘기일 것이다. 사람들은 절벽에 서게 되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 <베를린>의 뛰어난 작품이라는 건 허울뿐인 이데올로기의 얘기일랑 다 걷어 치우고 ‘사랑과 희생’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훈련 탓에 온몸이 살인병기인 표종성이 아랍 테러조직의 차에 실려 강제로 끌려가는 련정희의 뒤를 좇는 장면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가장 긴박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추격의 모습을 담은 이 장면은, 영화 처음으로 가슴에 눈물을 차오르게 만든다. 남자는 한번도 여자에게 제대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되찾으려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카메라는 차안 여자의 시점으로 좇아오는 남자의 안간힘을 찍어 낸다. 여자는 이미 알고 있다. 남자가 자신을 끝내 찾아 오리라는 것을. 여자는 또 안다. 자신 역시 결코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영화 <베를린>이 남성 관객만큼 많은 여성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을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사진=영화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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