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급>, 꽃다운 주인공이 어쩌다 사기꾼 됐나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지금 방송계의 화두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모아지는 듯하다. 그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어디까지가 어느 만큼이 진짜인가. 이는 <우리 결혼했어요>나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의 문제만이 아니다. 드라마에서도 진짜, 가짜 논란은 핵심 테마를 구성한다. <내 딸 서영이> 같은 연속극부터 <청담동 앨리스>, <야왕>, <7급 공무원> 등의 미니시리즈, 새로 시작한 <그 겨울, 바람이 분다>까지 온통 가짜의 삶을 선택하는 주인공들이 넘쳐난다.

이들은 자기 존재를 숨기고, 정체를 바꾸고, 가짜의 삶을 시작한다. 이들은 왜 가짜의, 거짓의 삶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안타고니스트인 악당들도 아니고, 만인의 지지와 성원을 받아야만 하는 드라마의 꽃다운 주인공들이 어쩌다가 하나 같이 사기꾼이 되었을까?

그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이 사회가 요구하고 부추기는 삶의 수준과 도저히 그것에 이를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가능성들의 세계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아래쪽 삶 사이의 간극. 그 꿈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욕망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들이 허구임을 알았을 때, 다른 누군가에겐 현실일 수 있는 그 가능성이 자신에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순간, 사기꾼들이 탄생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기꾼들의 탄생은 필연적이다. 이 가짜들은 더 이상 사용가치가 아닌 물질과 화폐와 자본이 지배하는 이 생생한 가상의 세계를 온몸으로 증언해준다. 로또가, 주식투자가, 부동산투자가 투자가 아닌 투기, 즉 사기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야금야금 털리건, 한순간에 몽땅 다 털리건, 그것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가지고 벌이는, 그것도 항상 밑지는 확률을 가지고 벌이는 엄청난 도박임을 말이다. 돈 놓고 돈 먹는 금융자본주의시스템이 사기가 아니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나.

<7급 공무원>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국정원이라는 국가정보조직이, 국가 자체가 거대한 사기임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가장 큰 폭력조직은 국가야.”라는 신입직원 훈육관 김원석(안내상)의 말은 핵심적이다. 그는 “우리는 총 쓰는 사람들이 아니고, 머리 쓰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폭력 쓰는 사람들이 아니고, 머리 쓰는 사람들이야.”라고 주장하면서 총 쓰는 법, 폭력 쓰는 법을 가르친다. 그들이 벌이는 국정원의 비밀공작이란 대체로 정체를 숨기고 신분을 감추고 벌이는 사기에 해당한다.



김서원(최강희)이 한길로(주원)의 아버지 한주만(독고영재)을 잡는 작전에 투입된 것은 길로와의 돈독한 관계 뿐 아니라, 그녀가 신입사원 연수에서 20년 만에 거짓말로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녀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일수도 있지만, 아마도 생존의 절실함이 그녀를 살아남게 했을 것이다.

조직은 한주만과 같은 특허기술을 빼돌리는 큰 사기꾼(자본가)을 잡기 위해 서원과 같은 생계형 거짓말쟁이, 사기꾼을 필요로 한다. 007을 꿈꾸는 한길로에게는 아버지 한주만을 지키라는 거짓 임무를 부여하고, 충심 깊은 공도하(황찬성)에게는 과거 참전시 명령불복종을 미끼로 국가에의 복종을 강요한다.

이 드라마의 중심 내용이 국정원요원들이 범죄자를 색출하는 것이 아닌, 과거 국정원 공작 중 희생된 사람들의 자식들이 그 국정원 요원들에게 복수하러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데서 상황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 요원들은 국민들을 지킨다는 이유로 국민을 배신해야 했으며, 대를 위해 소를 희생했으며, 양심과 임무 사이의 선택에서 양심을 버리고 임무를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 버려지고 내쳐진 어린 아이들이 잔혹한 킬러가 되어 국정원을 공격하러 온다. 조국에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이들이 그 조국으로 되돌아와 조국에 칼을 겨누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7급 공무원>은 첩보물로서는 함량 미달이다. 사건의 정체도 모호하고 얽혀 있는 사연도 부실하다. 잠깐 반짝하고 나타났던 엄태웅의 포스도 허무하고 황당한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대신 코미디와 로맨스가 살아 있다. 특히 경자(서원의 본명)의 부모인 김판석(이한위)과 오막내(김미경)가 담당하는 콤비 플레이 코미디는 단연 압권이다. 만담의 경지에 오른 이들의 치고 빠지는 구수한 입담은 개발독재 현대사를 종횡으로 시원스레 꿰뚫는다.

로맨스가 힘을 받는 것은 조직이 요원들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사랑을 이용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조직이 부여한 임무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속여야 하는 세 젊은이 사이의 로맨스와 우정은 위태롭게 나아간다. 사랑과 사랑을 이용한 공작 사이에서, 사랑과 임무 사이에서, 이들은 망설이고 갈등한다. “미안해. 넌 항상 열심히 사는데 나는 항상 너를 못 믿었어.” 길로의 고백은 서원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다.

“서원이는 지 좋아하는 남자 이용해 먹고, 길로는 지 아버지가 범죄자인 줄도 모르고 감시나 하고.” 훈육 요원 장영순(장영남)의 자조적인 목소리는 이 거짓된 세계를 말해준다. 여기서 모든 것이 가짜여도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짜라는 서원의 주장은 얼마나 무력한가. 이들의 사랑이 이 거짓의 시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 시대가 젊은이들의 사랑마저 잠식한다. 서원과 길로는 끝까지 서로를 의심하고 자신들의 사랑을 의심해야 한다. 서원이자 정원인 경자가 마침내 경자로 밝혀질 때까지.

문제는 이 거대한 사기시스템에 기생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도, 우리도. 가짜인 서원(본명은 경자)에겐 사랑의 진실이 아닌, 생존의 진실이 있다.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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