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말의 순정>, 독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다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매회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고, 질리도록 돈과 권력과 욕망이 난무하는 요즘 드라마들 사이에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하는 훈훈한 드라마가 하나 있어 소개한다. 얼마 전 방송을 시작한 KBS2 시트콤 <일말의 순정>. 뜬금없이 ‘순정’이라니, 제목만 들어서는 마치 6,70년대 영화 같지만 실은 요즘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야기이다. 보통 얘기라니까 오히려 가려던 관심조차 거둬들일 수도 있는 노릇이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귀가 솔깃할 이야깃거리가 많은지, 독하고 살벌하지 않아도 얼마나 재미있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드라마다.

굳이 누가 주인공이랄 것도 없지만 중심인물부터 주변 인물들까지, 모두가 각자의 삶과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살아있는 캐릭터들이라서 더더욱 좋은데, 사실 첫 회를 보고 놀란 건 연기자 김태훈 때문이었다. ‘저 남자가 내가 알던 김태훈,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홈페이지를 찾아 확인해봤을 정도로 180도로 달라진 그. 주로 앞서 언급한 독한 드라마들에서 냉철하기 짝이 없는 비정한 역할을 맡아온 그가 이토록 따뜻하고 유쾌한 남자로 변신할 줄이야. 아니 이렇게 귀여운 구석이 있었구나! 실제로는 어떤 쪽일까? 나쁜 남자일까, 살가울까? 궁금증이 새록새록 일어나지 뭔가.

배우 김태훈에 관한 내 첫 기억은 아마 MBC 아침드라마 <당신 참 예쁘다>일 게다. 대부분의 아침드라마들이 늘 그렇듯 착하고 헌신적인 여주인공이 한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고생 끝에 재기하는 내용이었는데 김태훈은 바로 여자를 버리는 남자 쪽을 맡았었다. 게다가 뭐한 놈이 성낸다고 재물과 지위를 얻고자 스스로 택한 아내에게조차 쌀쌀맞은 인물인지라 짐작컨대 시청자들로부터 미움깨나 받았으리라.



그리고 얼마 전 KBS2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에서의 가슴 서늘한 악역 연기. 희대의 악녀 한재희(박시연)보다 한 차원 높은 악랄함을 보인 안변호사가 나는 참 좋았다. 다름 아닌 가슴 속 깊이 숨겨둔 누구보다 뜨거운 순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런 김태훈이 이번엔 아예 ‘순정’을 제목으로 들고 나온 것. ‘순정’은 김태훈이 맡은 정우성이라는 인물의 딸 이름인데 <당신 참 예쁘다>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버리는 무책임한 남자였지만 여기서는 서른여덟 살 나이에 고등학교 1학년짜리 딸을 둔 ‘싱글대디’로 등장한다.

한 마디로 17년 째 홀아비인 셈이고 순정(지우)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측은한 처지이건만 어쩐 일인지 이 부녀에게서는 우울한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현직 교사임에도 허구한 날 천방지축, 철딱서니 없는 아빠를 오히려 일찌감치 철든 딸내미가 걱정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여기에 그가 첫사랑이라는 김선미(전미선)가 같은 학교로 전근을 오면서 엮이는 알콩달콩 러브라인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처럼 <일말의 순정>이 돋보이는 건 캐릭터가 주는 재미 때문이다. 동료 교사들도 모두 각자의 색을 가지고 있고 여느 드라마에서는 결혼을 반대하거나 종용하는 역할에 불과한 주인공의 엄마도 자신만의 분명한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교감(이윤상) 선생님은 가족이 없나? 왜 맨날 회식을 제안하는 걸까? 도도한 마은희(서이숙) 선생은 그 미모에 왜 결혼을 안 했을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기간제 교사 하소연(한수연) 선생은 선미와 우정과 사랑을 오락가락하는 하정우(이훈)를 향한 해바라기를 계속하려나? 선미 어머니(권기선)의 수다 상대는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까? 참 궁금한 것들이 많다.

악역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지만 그럼에도 소박하지만 잔잔한 재미가 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이 드라마, 꼭 보십사 강력 추천한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사진=K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