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팩 라이징 스타’와 ‘댄스 살롱’ 매력에 풍덩 빠진 날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신나는 뮤지컬 공연과 난해한 현대무용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디로 발걸음을 움직이겠는가. 아마도 과반수 이상은 ‘뮤지컬’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공연예술센터의 ‘한팩 라이징 스타’와 국립현대무용단의 ‘댄스살롱’을 보고나면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올 듯 싶다. 발칙한 무용수들이 해독 불가능하고 추상적인 춤이라 여겨졌던 현대무용을 재정의 했기 때문이다.

2011년을 시작으로 매년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주최하는 ‘한팩 라이징스타’는 현재 주목받고 있는 차세대 안무가들을 선정하여 작가정신을 펼칠 수 있도록 돋움 발판을 마련해주는 장이다. 2013년 선정된 라이징 스타는 임지애 정정아 최승윤 곽고은 안수영 최수진 총 6명이었다. 이들은 두 팀으로 나눠져 지난 3월 29일과 30일, 4월 5일과 6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홍승엽 예술감독이 직접 해설자로 나선 국립현대무용단의 ‘댄스살롱’은 김정은 박근태 송주원 안영준 안무가의 4인 4색 무대를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친밀한 현대무용이다. 3월 29일부터 4월 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됐다.

두 작품을 다 챙겨보게 되면 현대무용 총 10편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는 셈. 하지만 아쉽게도 공연 시간을 착각해 임지애 안무가의 ‘뉴 몬스터(New Monster)’는 만나보지 못했다.

■ 왜 ‘무용’이 필요한가

왜 무용이 필요한지 알게 해준 현대무용 작품은 정정아 안무가의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였다. 우선, 이 작품은 무용수 혹은 무용 마니아 입장에선 신선함이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무용을 처음 시작할 때 흔히 하기 마련인 공을 가지고 하는 제스처로 극을 시작한 점, 무용수의 기량을 보여주기 보다는 관객을 끌어들여 함께 하는 놀이처럼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스콜 쇼케이스로 (객석에 앉아서)미리 봤을 때 역시 큰 기대감은 없었다.

그런데, 객석을 비우고 무대 위로 함께 올라와 무용수와 관객의 구분이 사라진 순간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곧 ‘사랑’하는 마음을 무용으로 표현해 보라는 안무가의 지시에 따라 몇몇의 관객이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이어 객석에서 숨어있던 무용수들이 튀어나와 관객의 리더가 됐다. 그들은 관객들의 손과 손, 팔과 팔, 어깨와 어깨 등을 연결해주며 친밀한 세계로 안내하는가 하면,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 하게 만들었다. 신기한 점은 단순히 따라 하기 제스처로 보였던 장면 장면들이 어느 순간 무용수의 몸짓 부럽지 않은 움직임으로 바꿔진 점이다. 관객과 관객, 관객과 무용수의 스킨쉽 효과도 무시할 수 없었을 듯 싶다. 그 결과 움직임 놀이에 동참하지 못한 일부 관객은 자신이 아닌,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만 관찰하는 형국이 됐다. 기자는 다행이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게 된 부류에 속했다. 색다른 경험으로 인해 어렵게만 느껴지는 ‘무용’이 삶과 밀접하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최승윤 안무가의 '사라지기 위한 시간'은 부드러운 양탄자의 촉감으로 기억되는 현대무용이다. 신발을 벗고 부드러운 털 매트가 깔린 좌석에 앉는 순간부터 관객의 발 촉각은 무장해제 된다. 왜 이런 형태의 관람석을 만들었을까는 공연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됐다.

안무가는 ‘사랑의 본질과 성질에 대한 다른 미학적 관점을 공유하고자 한다.’고 작품의도를 밝혔다. 제의형식(Ritual)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의 초반은 다소 난해했다. 중반 이후엔 실연의 상처를 털어내듯 그도 아니면 내가 정의한 사랑과 상대가 정의한 사랑의 간극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감정의 희생양처럼, 챔피온 포즈로 세상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뛰었다. 하지만 이내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엎드려 온 몸의 걱정, 슬픔, 외로움, 비의, 사랑에 대한 허기 등을 빠르고 격렬하게 털어냈다.

이 때부터 무용은 강력히 관객을 끌어당겼다. 안무가이자 무용수는 겹겹이 입은 총 6개의 상의를 하나씩 벗어 무대 위에 빨랫줄을 만들어 널어놓았다. 머리에 쓴 꽃 머리띠는 물론 양말까지 몽땅 벗어 빨랫줄에 주렁 주렁 널었다. 그녀의 마음이 시원하고 홀가분해지듯 관객들의 마음도 편해졌다. 마지막 장면은 공감의 웃음을 날릴 수 있게 만들었다. 이리저리 휩쓸렸던 여러 감정들을 정리하듯, 주인공은 시큼한 레몬, 부드러운 식빵, 달콤한 초콜릿 등을 관객과 나눠 먹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이 음식물 각각의 맛 처럼 그녀가 체험한 다양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발 끝에 와 닿는 부드러운 양탄자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현대무용이 이렇게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도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정은 안무가의 <쓰리 Three>는 조직이 거친 파란색 매트 위에서 무용수들이 움직이게 한 촉각을 자극하는 무용이다. 단, 숫자 3의 의미를 담은 세 개의 감각, 세 개의 감정, 세 개의 몸이 만나 이루어내는 충돌과 조화가 포인트이다. 야광 고삐 모양의 장난감을 입 안에 넣고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무용수가 있는가 하면, 가글소리를 내는 연극 배우도 있다. 이 연극배우는 무대 3층으로 올라가 오페라 가수라도 된 듯 노래를 부르는 흉내를 낸다. 움직임과 소리가 연계된 채 세 개의 몸이 서로 만나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주는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하얀 스티로폼 공으로 정점을 찍는다. 이 장면에 대해 9세 꼬마 관객은 “하늘에서 시원하고 달콤한 구슬 아이스크림이 떨어지는 신나는 경험”이었다고 전했다.



■ 난 네가 극장에 오는 이유를 알고 있다.

곽고은 안무가의 '판매를 위한 춤'도 후반에 동그란 작은 ‘공’들이 떨어진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들은 판매를 위해 전시된 무용수들이다. ‘For Sale’이라고 적힌 회전판 위에서 무용수들의 몸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극이 시작한다.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의 숨은 욕망이 하나 둘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쯤, 뒷 배경 막이 다채롭게 변화되는 영상이 눈길을 잡아끈다. 곧 대극장의 스펙타클을 기대한 관객의 요구에 부합하듯 3명의 무용수 모두 줄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판매를 위해 전시된 무용수는 인사 없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 결국 무대 인사는 없이 끝났다. 관객은 이 작품에서 뭘 느꼈을까. 구매자로서 이 ‘무용’을 취사선택 했을까. 아니면 다른 ‘무용’을 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을까. 최종결정은 관객 몫으로 남겨졌다.

최수진의 '아웃 오브 마인드 Out of Mind'와 송주원의 <환. 각 (幻. 刻)>은 내밀한 삶의 기억과 관계를 그려낸 작품. 두 작품 모두 오브제를 적극 활용해 작품 주제를 견고히 했다. ‘아웃 오브 마인드’는 다양한 옷이 걸린 이동식 옷걸이, 꾸역 꾸역 들어찬 수십가지 형태의 인간관계가 한계점에 다다란 듯 내 팽겨쳐지는 수백장의 종이, 금방이라도 마음을 내 줄 것처럼 ‘하늘 하늘’거리는 커튼을 오브제로 활용했다. 종이를 내동댕이 칠 때 일어나는 먼지와 연기 효과가 구석구석 쌓아 둔 과거의 기억을 불러냈다. 이어서 얼굴 전체를 커튼으로 감싼 채 몽환적인 시간여행을 떠난 무용수가 사라진 무대 위에는 제멋대로 늘어진 이탈리안식 블라인드만 어지럽게 걸려있었다. 구구절절 말하기 힘든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무용’ 만한 게 없겠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커튼 뒤의 실루엣 장면에서는 카롤린 칼송의 ‘블루레이디’가 떠오르기도 했다.

송주원 안무가의 기억을 바라보는 시선 <환. 각 (幻. 刻)>은 기억의 왜곡, 편집, 불분명함, 즉 '기억의 환타지성'에 대해 다룬 작품. 또한 <댄스살롱> 네 작품 중 가장 많은 웃음이 터진 현대무용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환각’(幻覺)과 다른 점이라면 ‘깨달을 각’이 아닌 ‘새길 각’을 쓴 <환. 각 (幻. 刻)>이란 점. 그대로 풀이하자면, 헛 보이는 것을 새기다‘는 뜻. 삶의 기억들과 기록들이 편집되거나 불분명한 기억의 연속으로 표현된다. 무용 속에서 ’환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특히 ’머리카락‘을 오브제로 사용한 강력한 장면과 움직임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의 머리카락으로 연결된 여인들, 머리카락으로 줄넘기를 하는 여인, 까만 고무줄로 머리카락 형태를 만든 여인, 얼굴 전체를 머리카락으로 뒤덮은 여인, 상대의 머리를 잡아당기는 여인 등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계속 됐다. 급기야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네모 판을 머리에 이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수십 개의 까만 풍선을 그물 망에 넣은 채 머리 위에 고정시키고 등장해 구음을 들려주는 여인(정마리)은 한없이 이어지는 기억들의 울림을 지속시키게 만들었다. 까맣고도 까만 이미지와 구슬픈 구음이 함께한 무용으로 기억 될 듯 싶다.



■ 무용도 통역이 되나요

안수영의 '타임 트래블 칠공팔공 Time Travel 7080'과 박근태의 ‘아이 위시 I wish..짧은 사랑에 대해 지껄이다’는 추상적인 무용이 현장에서 바로 바로 통역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만든 현대무용이다.

두 작품 모두 유쾌하게 발상을 뒤집었다. 안수영은 초반부터 범상치 않은 ‘위트’를 내 비쳤다. 멋지게 기타 케이스를 들고 나와 기타를 연주할 것 같이 폼을 잡더니, 막상 그 안에서 꺼낸 건 ‘핸드폰’이었다. 이 때부터 웃음이 터진 관객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 음악을 안주 삼아 아르코 대극장 커튼을 이불 삼아 누운 두 명의 무용수 등장에 눈빛을 빛냈다.

안무가 안수영은 쥬크박스 뮤지컬의 형식을 차용해 무용수의 움직임이 필요한 적재적소에 기존의 대중가요를 활용했다. 예를 들면, 친구와의 관계가 자꾸만 어긋나는 감정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에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래 가사 중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라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식이다. 이렇게 되니 무용 전체 내용 전달이 보다 명확해졌다. 객석 관객들의 호응도 좋았다. 친숙한 노래와 재미있는 무용이 합쳐지니 추억도 새록 새록 떠올랐다. “무용계의 ‘찰리채플린’이 탄생했구나”란 말도 튀어나왔다.

현대무용을 관람하러 온 관객들이 무용수의 멋진 몸놀림에 반해 감탄을 하는 경우는 봤어도, 이렇게 공감의 웃음을 날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점에서 긍정의 표를 던지고 싶다. 다만,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 해 다채로운 해석이 나오는 게 현대무용의 백미라고 여기고 있는 관객이라면 전적으로 박수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박근태 안무가의 'I wish..짧은 사랑에 대해 지껄이다'의 외면은 '수다'처럼 가볍게 풀어낸 ‘사랑 이야기’이다. 라이브로 연주되는 피아노 음악이 함께하는 이번 작품은 수다를 떨고 있는 상태에서 춤과 대사가 동시에 표현되는 기발함이 빛났다. 또한 부산 사투리의 질감과 우아한 무용의 파동이 결합하자 예상 못한 감칠맛이 쏙쏙 베어나왔다. 이 안무기법이 관통하는 지점은 대중과 무용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이점 외에도 타인의 사랑을 바라보는 가벼운 시선까지 의미 깊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 부산스러움 속에 드러난 ‘사랑의 깊이감’이 상당히 유쾌하게 다가온 무용이기도 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어보이는 박근태 안무가가 안수영 안무가의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하는 점이다.

안영준 안무가의 <카니발, 카니발(Carnival, Cannibal)>은 한 편의 단막극을 보듯 관객을 집중시켰다. ‘똑딱’ 거리는 시계 소리가 신경을 자극한다. 네 명의 남자무용수와 한 명의 여자무용수는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해 일탈과 해방의 시공간인 카니발(carnival)으로 걸어 들어간 뒤, 가해와 피해, 폭력과 유린, 놀이가 엉망으로 뒤섞인 식인행위(caniballism) 현장으로 무섭게 파고 들어갔다. 정글짐을 활용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약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크로바틱 동작과 팔과 손이 어지럽게 엮기는 장면을 다채로운 안무로 구획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연약할 줄만 알았던 토끼 가면을 쓴 여인이 실은 그 누구보다 무자비한 원더우먼(혹은 슈퍼맨)으로 재 탄생하는 지점. 자유자재로 가면을 바꿔 쓴 채 살아가는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거침없이 불러낸 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KBS 2TV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현대레알사전'을 빌려 ‘현대무용’을 재정의한다면, ‘표현의 한계가 없어 화수분처럼 계속 재미가 쏟아지는 예술장르가 바로 현대무용’이지 않을까.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현대무용단, 한국공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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