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의 주먹>, 남자들의 격투기 영화인줄 알았더니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강우석은 지금껏 한국 대중관객의 욕구를 비교적 정확히 포착해 내고 반영해 내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그점이야말로 강우석이 만드는 영화마다 대부분 상업적으로 성공하게 한 주된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재능만으로 강우석의 영화를 설명하는 건 부족하다. 또 그건 다소 부당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강우석의 영화는 100% 올바른 평가를 받아왔다고 보기 어렵다. 그의 지난 영화들의 상당수는 그래서, 재평가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강우석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놓쳐온 것은 그의 직설적인 사회의식이다. 사람들은 간과하는 면이 많지만 강우석의 영화는 거의 매 작품마다 사회적 주제의식을 극 전반에 주단처럼 깔아 놓았다.

초기작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입시위주의 교육이 불러 오는 비극을 담고 있었던 것에서부터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그의 흥행 실패작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는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실업과 도시빈민으로 고통받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는 정치권을 향한 ‘돌직구’같은 영화였고 <투캅스> 시리즈는 비리 경찰을 코믹한 터치로, <공공의 적> 시리즈는 일선 검사의 모습을 통해 국내 상류층들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했다. 그의 메가 히트작 <실미도>는 국내에서 거의 처음으로 북파공작원 문제를 공론화시켰으며 극단적 민족주의로 폄하됐지만 <한반도>는 남북한 간의 새로운 관계를 보여준 영화였다.

예상보다 성공하지 못해 그에게 실망을 안겨줬던 <글로브> 이후 강우석이 새롭고, 야심차게 내놓은 새영화 <전설의 주먹>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작품이다. <전설의 주먹>은 예고편과 그를 둘러싼 마케팅의 상당 부분 때문에 남자들의 격투기 영화쯤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도 않으며 또 그걸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홍보전략 상 올바른 것일 수도 있다. <전설의 주먹>은 고등학교 때 ‘짱’의 전설을 지닌 ‘주먹’들이 ‘찌질이 40대’가 된 지금 한 유력 케이블TV가 주최한 격투기 대회에서 상금을 둘러싸고 다시 한번 숙명의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짱’이나 ‘주먹’ 혹은 ‘격투기 대회’가 아니다. 방점은 ‘찌질이 40대’ 위에 찍힌다.

<전설의 주먹>은 우리의 왜곡된 자본주의 환경에서 자꾸만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40대 가장들의 울분을 담아낸다. 비상구와 탈출구를 잃어버린 그들은 차라리 사각의 링 안으로 들어가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제 주먹질은 더 이상의 유희가 아니다. 생존이다. <주먹의 전설>은 사회적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 시대 가장들의 눈물겨운 얘기를 담는다.



영화는 2시간 반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 동안 인물들의 현재와 고등학생 때인 과거를 빠르고 다이너믹하게 교직시키며 보는 이들을 숨가쁜 재미로 몰고 간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이 이 영화에 가슴이 울컥하는 것이 현재의 간난한 모습들이다. 영화 속 임덕규(황정민)는 국수집을 하며 딸 아이(지우)의 사춘기적 앙탈에 억장이 무너진다. 어느 날 그는 돌아 누운 딸 아이의 뒤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상훈(유준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고등학교 때 자신이 뒤를 돌봐 준 진호(정웅인)가 회장인 대기업에서 ‘더럽고 치사한’ 일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는 진호에게 깍듯이 존대를 하며 지낸다. 어느 날 그는 회장이자 친구인 진호에게 분노의 일갈을 던진 후 회사를 뛰쳐 나온다. 그는 이제 갈 곳이 없다. 살육의 이 사회에서 그는 이제 자신이 버려졌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건 이미 예정된 일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학을 보낸 아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오버한다. “아빠가 잘하는 게 뭐야?! 아빠 돈 잘벌잖아?! 아빠 잘 나가잖아?!”

사회를 향해 직접화법의 어휘를 영화 곳곳에 숨겨놓기를 즐겨 온 감독처럼 <전설의 주먹> 역시 시원한 펀치가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 강우석은 정웅인이 맡은 진호 역을 통해 우리사회 재벌들의 악마성을 숨김없이 까발린다. 고등학교 때도 ‘주먹’들의 뒤에 기생하며 얄팍하게 살아 간 진호는 성장 후 재벌 회장이 된 이후에도 야비한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그가 회장실에서 중역들에게 ‘빠따’를 친 후 수표 뭉텅이를 주는 모습은 명백히 SK家 최철원 사건(M&M사 대표로 고용승계 문제로 갈등을 빚은 탱크로리 기사를 야구 배트로 폭행하고 맷값 2천만원을 건넨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극중 진호가 룸살롱에서 행패를 부리는 모습은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을 연상케 한다. 강우석의 직설적 공세는 그뿐만이 아니다. 고등학교 회상 장면에서 상훈(유준상 아역 구원)은 88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있는 덕규(황정민 아역 박정민)에게 어느 재개발 현장을 언덕에서 굽어보며 지나치듯 중얼거린다. “아 근데 올림픽은 잠실에서 하는데 왜 사당동을 부수냐?”



강우석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안 그런 척 늘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태를 보여왔다. 너무 올바르기 때문에 때론 지나치게 순진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의 정치관은 아주 정교하지는 않다. 강우석은 영화 속 정치적 어법이 너무 세련되면 오히려 그건 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발언을 코미디 뒤에, 드라마 뒤에 적절히 배치시킨다. <전설의 주먹> 역시 그의 일관된 사회정치의식의 이곳저곳에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는 영화이며, 따라서 그는 깨어있는 관객들이 그걸 발견하며 낄낄대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설의 주먹>은 매번 그렇지만, 강우석의 또 다른 역작의 한편이다. 강우석만큼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 때마다 역작을 만들어 내는 인물도 드물다. 그는 현재까지 20여년동안 19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강우석은 1980년대 이후의 현대 한국영화 감독 가운데 최장 기간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며 최다 편수의 작품을 만든 감독이다. 무엇보다 최다 관객을 모은 감독이기도 하다.

<전설의 주먹>은 과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위치를 놓이게 될 작품이 될까. 현란한 스타일의 작품들이 대세가 된 시대에 강우석의 영화는 고집스럽게 비주얼보다는 스토리를 중시해 왔다. 시대는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뀌면 안 되는 것들도 있다. 강우석의 영화가 바로 그렇다. ‘영화시대’의 ‘페이지’는 분명 넘어갔지만 영화란 책은 앞페이지와 뒷페이지를 오가며 읽는 것이다. <전설의 주먹>이 어떤 반응을 얻느냐에 관심이 크게 모아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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