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어둠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소. 사실, 빛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도 환영일 때가 많소이다.”

국립극단이 지난 15일부터 선 보이고 있는 한태숙 연출의 <안티고네> 무대는 상당히 어둡다. 이 무대가 밝아지는 순간은 어깨에서 염통까지 잔인하게 난자당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객석을 향해 굴러 떨어지는 폴리니케스의 시신이 나오는 초반 장면과 ‘안티고네’의 자살이란 불안한 예감과 맞물리며 가뭄(혹은 지진)에 땅이 쩍쩍 갈라지듯 무대바닥이 두 동강이 난 순간이다. 그 환한 빛 속에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본 살아있는 수 많은 인간들. 그리고 도시를 빨아들일 것 같은 비극의 틈새를 뚫고 올라온 빛 속에 본 죽은 자 중 누가 진짜였을까.

소포클레스 고전을 김민정이 각색한 연극 <안티고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결국 자살을 선택한 보통남자 ‘오이디푸스’ 딸 ‘안티고네’의 또 다른 비극을 담은 작품. 지난 2011년 < 오이디푸스> 이후 연출가 한태숙이 선보이는 소포클레스 연작이다.

<오이디푸스>가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한 인간의 자기인식에 관한 이야기라면, 2013년 <안티고네>는 비극 속에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자기 파괴적인 ‘안티고네’와 맹목적 신념에 사로잡혀 산산히 부서지는 ‘크레온’에 주목한다.

‘크레온’와 ‘안티고네’는 칙령이라는 인간의 법과 시신매장이라는 신의 법 사이에서 대립한다. 숙부 크레온은 ‘폴리니케스를 조국의 배신자로 간주하여 짐승의 먹이가 되게 내버려두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크레온 몰래 오빠의 주검을 매장하다 노여움을 사게 된다.



2013년 <안티고네>는 원작 코러스의 역할을 ‘테베 시민’으로 상정했다. 또한 도시의 비극을 예고하는 검은 새떼는 코러스의 움직임을 통해, 공포와 불안의 심리를 형상화 한다. 9미터 높이의 절벽은 아니지만 이번 연극 역시 가파른 삼각형 경사무대에서 펼쳐진다. 아슬 아슬한 무대 위에서 시민들은 부르르 떠는 움직임과 동요하는 떨림을 표현해냈다. 혼돈스런 떨림과 절규는 어둠 속에서 예리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미쳐 돌아가고 있는 현 시대와 통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무용수 이경은의 몸짓과 내면의 혼돈을 음악으로 담아낸 홍정의의 구슬픈 음악이 시청각을 자극했다.

길다란 지팡이를 들고 까마귀 무리와 함께 등장한 예언자 테레시아스(박정자)는 이전 <오이디푸스>에서 보다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단 2번의 등장으로 관객의 마음은 ‘움찔’ 거린다. 또한 ‘죽은 자가 산 자를 원망하고’, ‘걷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된 이’를 보며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인간들의 무지에 쓴 웃음이 나온다.

100분 동안 흡인력 있게 끌고 가는 힘이 강한 연극이다. 다만 아쉬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노회하고 오만한 정치 9단 크레온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안티고네의 밀고 당기는 긴장감을 보여 준다고 했던 약속과는 달리 치명적 맹목성이 다소 약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대화와 행동에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줄다리기가 금방이라도 튕겨 끊어질 것 처럼 조금 더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크레온에게 닥친 연쇄적인 가족의 죽음, 그리고 절정의 비극을 관객이 온 몸으로 경험하기 힘들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비극의 창을 통해 맛 본 소시민의 카타르시스’를 이 만큼 충만하게 표현 해 낼 수 있는 고전을 국내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이유 있는 매진 행렬은 계속 되고 있다. 인터파크 티켓은 공연 개막 전에 이미 전석 매진 됐다. 국립극단 내 예매 사이트에 남은 소수 좌석 빼고는 표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후문이다. 배우 전혜진, 이선균 부부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명동예술극장의 <러브 러브 러브>,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레프 도진의 <세자매>에 이어 2013년 들어 세 번째로 매진되는 연극 신화를 만들어 낼 듯 하다.

28일까지 공연되는 <안티고네>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의 재개관 이후 첫 연극 작품이다. 배우 신구(크레온), 박정자(테레시아스), 김호정(안티고네), 이갑선(하이몬), 윤현길(이스메네), 우현주(유리디케), 손진환, 서경화, 신덕호, 강진휘, 박종태, 황성대, 이지혜, 심완준, 최순진, 전운종, 허진 등이 출연해 열연을 펼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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