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들>, 혁명적인 주크 박스 뮤지컬의 탄생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나나 무수꾸리의 ‘버찌의 계절’이 배경음으로 깔리자 한 남자는 한 여자에게 사랑의 징표인 버찌 열매를 따 준다. 또 다른 한 남자는 삶의 문턱에서 통과의례처럼 만났던 김광석의 노래와 함께, 20년 전에 사라진 친구의 비밀을 파헤친다.

창작뮤지컬의 마이더스 손으로 불리는 장유정 연출의 신작 <그날들>이 개막했다. 장 연출가는 “어딘가 허전한 이야기, 억지스런 전개, 어지럽게 자리 잡은 음악들이 창작 주크박스 뮤지컬들의 한계로 다가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주크박스 뮤지컬을 보고 리뷰를 써야 하는 기자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많은 이들이 피땀 흘려 만든 공연 한 편에 대해 쓴 소리만 해야 하니 말이다.

이번엔 달랐다. ‘빙그레’ 웃음 짓게 되는 장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구성에 박수를 쳤기 때문이다. <그날들>은 기존의 주크박스 뮤지컬과 달리 이야기 뼈대 위에 음악 줄기를 균형 있게 맞췄다. 플롯의 치밀성을 놓고 본다면 가히 ‘혁명적인 주크 박스 뮤지컬’ 한 편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뮤지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장-바티스트 클레망이 쓴 시에 음을 붙인 샹송 ‘버찌의 계절’은 로망스와 혁명을 동시에 노래하는 음악이다. 뮤지컬 <그날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이다.

또 하나는 이야기를 살리기 위해 ‘음악’ 속에서 해답을 찾고 있는 역발상 서사이다. 무영과 그녀만의 악보에 적힌 암호 해석 법 장면이나 김광석 음악을 과감하게 편곡, 색깔을 달리해 인물들의 고뇌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 결과 지켜주지 못한 ‘김광석’과 사라진 경호원 ‘무영’의 삶이 함께 직교된다. 한편으론 베토벤의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는 연극 모이시스 카우프만의 <33개의 변주곡>이 떠오르게도 했다.



뮤지컬 <그날들>은 故 김광석의 노래로 청와대 경호관들의 이야기를 만든 미스터리 로맨스 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주인공 ‘정학’ 입장에서 보자면 매번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숨겨진 열정과 그리움, 자기완성에 대한 이야기다. 오랜 시간 작품에 공들인 작가는 ‘정학’과 그녀의 딸 ‘수지’로 대물림 되는 그림자 인생까지 요리해냈다.

무대는 세트를 최소화하고 실 커튼과 영상을 사용해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역사와 상황에 밀려나는 인물들의 현실을 구현하기 위한 장치로 회전무대를 사용하고 있다.

김광석 특유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느껴지는 넘버는 1막 마지막의 ‘그날들’과 2막 초반 운영관 역 이정열∙ 서현철 배우가 부르는 '부치지 않은 편지'이다. 특히 프레스 콜에서 들었던 이정열 배우의 목소리는 가사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와 아련한 음악적 정서를 고스란히 되살려내며 울컥하게 만든다.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 언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부치지 않은 편지’ 중에서)



배우들이 제 몫을 하고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단호한 ‘정학’역을 맡은 배우 오만석은 차갑지만 마음 깊은 한 남자를 무게감 있게 표현해냈다. ‘무영’역을 맡은 배우 지창욱은 본인의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 낭만∙ 여유∙ 위트를 한꺼번에 가진 이만큼 매력적인 경호원도 쉽게 찾기 어려울 듯 하다. 다만 가창 부분에서 조금만 더 서정적 정서를 살려내면 좋겠다. 경호원으로 출연한 배우 김대현과 박정표의 젊은 에너지는 극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서현철(운영관) 과 김소진(정학의 아내∙ 사서)의 코믹 연기, 송상은(하나), 이다연(수지)의 또랑 또랑한 음성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들>에서 다소 아쉬운 대목은 ‘그건 너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때문이야’란 넘버가 불려지는 부분. 문장 어법 상 맞지 않는 다소 어색한 제목이다. 이 제목을 그대로 서사에 끌어들였다. 원곡 대사까지 건드릴 수 없다는 점은 알겠으나 주인공들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주요 넘버가 어색하게 발음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도 100% 몰입하기 힘들었다.

<그날들>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은 드라마와 음악이 조화롭게 구성 된 뮤지컬 보다는 청춘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들었던 김광석의 음악과 추억을 듣고 싶어 극장에 찾았을 때 이다. 그런 관객들에게 장유정 연출과 장소영 음악 감독이 노래 한 곡을 들려준다. 바로 ‘기다려 줘’ 이다. 뮤지컬 속에서 관객들의 허를 찌르며 등장했던 이 곡이 당신에게 묻는다.

‘기다려 줘’ “난 아직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대 마음에 이르는 그 길을 찾고 있어”.

버찌의 계절은 짧다. 제대로 만들어진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나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장소영 연출이 새로운 창작 뮤지컬의 지평을 연 뮤지컬 <그날들>은 6월 30일까지 서울 대학로뮤지컬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배우 유준상 오만석 강태을(정학), 최재웅 지창욱 오종혁(무영), 방진의 김정화, 서현철 이정열, 김산호 김대현, 박정표 정순원 김소진 송상은 이다연 등이 출연한다.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이다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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