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카를로>, 오페라 가수가 갖춰야 할 진짜 ‘예의’를 알려준 대가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한국 관객들의 심리 저 편에는 나이든 가수 혹은 연기자에 대한 예의라는 게 있다. 60살이 넘어 무대에 오르는 가수가 전성기 만큼은 잘 하지 못할지라도 찬사를 보내는 태도 말이다.

지난 25일부터 28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국립오페라단의 <돈 카를로>를 보러 가면서도 이 예의라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지금까지 고령의 가수들 공연을 보면서 만족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예의도 없는 괘씸한 글쟁이로 전락할 것인가. 날카로운 촉을 거두고 두리 뭉실한 리뷰를 뽑아낼 것인가에 대한 심리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이스 강병운이 분한 ‘필립 왕’이 등장하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무대에 빨려 들어갔다. 한국 관객의 기억 속에 강병운은 오로지 전설로만 남아있을 뿐, 눈 앞에서 실체를 만나지 못했던 가수이다. 동양인 최초로 베를린오퍼 전속 솔리스트를 거쳐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입성해 화제를 모았지만 좀처럼 국내 무대에선 볼 수 없었다. 드디어 그 실체를 만났다.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날카로운 촉은 그대로 둔 채 온전히 빠져들어 감상할 수 있었던 점에서 더욱 행복했던 공연이기도 했다. 이런 게 진짜 오페라 가수가 갖춰야 할 예의 아닐까.

■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 하지만 관객은 ‘필립 강병운’을 연민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가수의 입과 소리 방향으로만 관객을 주목시키는 가수가 있는가 하면 몸 전체로 기운을 뿜어내 관객을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가수가 있다. 베이스 강병운은 단연코 후자였다. 오랜만에 가수의 입이 아닌 몸 전체를 바라보게 됐다. 머리 위 왕관이 짓누르는 왕의 무게감, 연민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뒷모습, 의심과 불안으로 점철된 떨리는 눈빛, 기품 있는 한걸음 한걸음 등 그는 스페인의 독재자 왕이면서 불행한 아비이고 불쌍한 남편 이였다.

그렇게 고독했던 독재자에 대한 연민을 베이스 강병운의 몸체와 소리에서 느꼈다. 물론 강병운의 소리에 100% 만족을 보내지 못한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시원하고 단단하게 뻗어나가는 소리를 선호하는 국내 관객들의 특성상 더욱 그러했을 듯 싶다. 그래서 또 다른 젊은 필립 왕으로 분한 베이스 임채준의 소리와 연기까지 같이 감상했다.

처음으로 ‘필립’ 역에 데뷔하는 임채준은 소리만을 놓고 볼 때 절대 밀리지 않는 실력을 뽐냈다. 그럼에도 나와 당신, 우리가 보러 간 건 콘서트가 아닌 종합예술인 오페라다. 강병운에겐 독재자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면, 임채준에겐 연민보다는 포악한 정치인과 냉혈한 남편의 색이 더 짙게 느껴졌다.

왕비가 왕자와 더불어 간통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장면에서 임채준은 분을 참지 못해 과격하게 화를 냈다면 강병운은 화를 내는 건 같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동정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남겨뒀다. 극 전체 흐름을 놓고 볼 때 젊은 필립의 행동은 필립의 유명 아리아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의 감동을 깨는 제스처였다. 엘 에스코리알 궁전 묘지에 묻히기 전까진 영원히 사악한 인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탄식하는 필립의 절절한 감정을 이끌어내야 함에도 사악한 인물,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



■ 절대적 통치자의 고립과 폭정에 대항하는 자유를 그린 오페라 <돈 카를로>

베르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돈카를로>는 16세기 스페인 궁정의 실화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역사물에 정치적 이상의 좌절, 비극적 사랑과 가족관계를 담은 작품. 1867년 프랑스 정부의 위촉을 받아 방대한 스케일을 가진 5막의 그랜드오페라로 초연된 이후, 4막의 이탈리아어로 개작되어 1884년 밀라노 라스칼라극장에서 재 초연 되었다. 국립오페라단은 4막 이탈리아어 판으로 공연을 선보였다.

<돈 카를로>의 주인공이자 스페인의 왕자 카를로는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타와 사랑하는 사이로 이미 약혼까지 한 상태지만 곧 애인을 왕비이자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카를로는 ‘사랑’을 놓고 아버지와 대치되는 상황 뿐 아니라 정치적인 노선 역시 달라 갈등의 길을 가게 된다.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베르디 오페라 연출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엘라이저 모신스키가 연출한 <돈 카를로>(협력연출 장영아)에서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절대적 통치자의 고립으로 표현한 무대 콘셉트다. 헤르베르트 무라우어가 스페인의 엘 에스코리알 궁전을 참고해 만든 차가운 콘크리트 무대는 필립을 짓누르는 교회이자 궁전, 더 나아가 감옥이자 묘지였다. 라인하르트 트라우프의 조명디자인 만으로도 무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자유자재로 변신했다.

<팔스타프>의 무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장을 불투명 창으로 만들어 자유를 억압하는 속세에선 어디로든 나아갈 수 없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다만 그 외엔 거장 연출의 손길을 확연히 느낄 수는 없었다. 마지막, 선왕이 카를로 왕자를 데려가는 장면의 신비감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



■ 베르디 지상 최고의 아리아와 중창의 향연으로 초대한 가수는 누구?

주역을 맡은 돈 카를로 역 테너와 로드리고 역 바리톤에 대해선 의견이 나뉠 듯 하다. 테너 나승서와 바리톤 공병우가 부르는 '우정의 이중창' 과 '행복한 심정으로 죽어갑니다‘는 감정이 절절히 녹아있었다. 더하고 빼는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수십 아니 수백 번 했음이 드러나는 연기와 소리였기 때문이다.

반면 테너 김중일과 바리톤 정승기가 부르는 이중창은 혈기왕성한 느낌이 강했다. 티토 곱비를 연상시키는 음색에 베르디의 오페라에 가장 잘 어울릴 만한 풍부한 성량이 일품인 정승기의 국내 데뷔 무대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젊은 가수라 템포를 촘촘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무르익지 않아 후반 로드리고의 죽음과 심정에 완전히 동화되긴 힘들었다. 김중일의 윤기있는 보이스 컬러는 나쁘지 않았지만 연기 면에서 깊이감이 부족했다.

엘리자베타 역을 맡은 소프라노 박현주와 남혜원은 어느 누가 더 낫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삶에 이미 저녁이 드리워진 여왕이자 여인으로 분해 피아니시모부터 포르테까지 풍부한 성량을 보여준 두 소프라노는 엘리자베타 역에 모두 적역으로 보였다. 에볼리 공녀 역 메조소프라노 나타샤 페트린스키는 강렬하게 밀어붙이는 음색으로 존재감을 각인시켰으나 지나치게 업 되어 있는 느낌을 준 점은 아쉽다. 또 다른 에볼리 역 메조소프라노 정수연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유연하고 생동감 있는 소리와 집중도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저주스런 나의 미모‘는 절창이었다.

인본주의자로서 베르디의 모든 역량을 느낄 수 있는 오페라 <돈 카를로>를 좋아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저음 가수의 깊은 음색을 만날 수 있다는 점. 특히 3막에서 임팩트 있게 등장하는 종교재판관과 필립의 2중창, 공연의 막을 열고 닫는 수도사(카를로 5세)의 등장이 그러하다. 종교재판관 역을 맡은 베이스 양희준은 중후한 보이스 컬러로 호평을 받았다. 다만 눈이 멀고 나이는 90세나 된 늙은 종교재판관이라고 보기엔 연기나 소리 면에서 지나치게 젊다는 느낌이 든 점이 아쉽다. 욕심을 더 내 나이차가 있는 두 필립 각각에 맞추어 소리와 연기를 조절해주길 바랬는데 모두 한 가지 색깔만 선 보인 점도 마음에 걸렸다. 2층 무대에 올라서 군중이 감옥으로 몰려오는 씬에 개입하는 장면의 카리스마도 다소 부족했다.

카를로 5세로 나온 베이스 전준한은 마치 무덤 속에서 울리는 듯 최저성인 베이스로 선왕의 존재감을 각인시켜줬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았지만 충분한 호소력을 갖춘 시원한 가창을 선보였다. 또한 가수 개인적인 아쉬움보다는 선왕의 의상과 왕관이 다소 어색하게 제작된 점이 눈을 거스르게 했다. 시종 테발도 및 천상의소리 소프라노 최우영, 레마백작 테너 정호석, 전령 테너 김용호, 국립합창단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지휘자 피에트로 리초는 베르디의 내면적 드라마를 음악에서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치밀한 지휘로 프라임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다만 공연 전반부보다는 후반부에서 연주의 결이 살아났다.

한편, 국립오페라단은 <돈 카를로> 이후 대한민국오페라 페스티벌 참가작 오페라 <처용>(6.8~9일 예술의전당)을 선보인다. 작곡가 이영조, 지휘자 정치용, 연출 양정웅이 만나 처용과 가실의 사랑이야기를 뛰어넘는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를 그릴 예정. 소프라노 임세경, 베이스 전준한, 바리톤 우주호 오승용 박경종이 출연한다.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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