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치가 꿈 속에 있는’ 무사가 ‘칼’을 꺼내 들 때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간단한 퀴즈를 내 보자. 고연옥 작가, 강량원 연출의 <칼집 속에 아버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강의 무사로 추앙받았지만 변소 간에 처박힌 채 살해당한 아버지 ‘찬솔아비’일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칼을 든 아들 ‘갈매’일까. 아쉽게도 정답은 둘 다 아니다.

정답은 신과 악마의 축복을 받아 더 이상 늙지 않는 지상의 왕 ‘검은 등’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칼집 속에 든 아버지는 결국 선과 악, 하늘과 땅의 축복을 동시에 받아 칼을 꺼낼 이유가 없는 ‘검은 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연극 초반 사공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최종 퍼즐의 한 조각이었음을 알게 될 때 깨닫게 된다.

수많은 무사들이 ‘검은 등’이란 괴수를 처단하기 위해 찾아오나, 몸이 산산이 찢겨진 채 죽어나갈 뿐이다. 그의 무기는 무사들을 그의 꿈속에 가두어 스스로를 조각 내 죽이게 만드는 주술을 부리는 것. 이 세계의 낡은 규칙에 따라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인 ‘갈매’는 지상의 마지막 무사가 되어 대결을 벌이게 된다.

2013 국립극단 봄 마당 축제의 첫 번째 작품인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를 보며 가장 관심을 잡아끄는 인물은 ‘검은 등’이었다. 지난 4월 30일에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검은 등과 찬솔아비 1인 2역을 맡은 배우 김정호는 “검은 등과 찬솔 아비가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혼란이 올 수도 있다”며 “어찌 보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자아”라고 전했다.

“찬솔 아비와 검은 등이 합쳐진 캐릭터가 ‘갈매’이다. 과연 ‘악’이란 무엇이냐. 타고난 본성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더 나아가 난 악인인가. 선하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1인 2역에 대해 선과 악이란 잣대로 구분하기보다는 내 안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답변했다.

<칼집 속에 아버지>는 바이칼 호수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게세르 신화를 차용했다. 게세르 신화는 혼돈에 빠진 인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영웅으로 활약한다는 내용.



꿈과 현실, 신화의 중첩 그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연극이다. 갈매의 꿈 속 세상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갈매’는 자기 내면의 그림자와 싸우는 무사로 칼을 쓸 일이 없는 무사이다. ‘눈치가 꿈 속에 있는’ 무사가 길잡이 사공의 도움을 받아 과연 꿈 속에서 깰 수 있을까.

고연옥 작가가 작정하고 재미있게 쓴 작품이다. 극 속에서 무사들은 칼로 싸우기 보다는 말로 싸운다. 싸우면 싸울수록 더 많은 적들에 둘러싸이는 처절한 싸움꾼. 무사들 사이에서 등장하는 이장, 목사, 기자 등의 존재가 흥미롭다. 특히 기자의 입장에서 본 기자의 대사 하나 하나에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이 연극을 ‘이렇게 분석하며 보고 있을 것’이다는 전직 기자 출신 작가의 위트가 빛났기 때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을 끝 낸 뒤 ‘갈매’는 “나 이제야 돌아왔어요”라고 읊조린다. 김영민은 “그 대사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어려운 대사이다”라며 “갈매가 휴식을 찾는다, 아무리 나약한 것일지라도 비웃지 말라. 콤플렉스가 세상을 바꾼다, 자기와의 싸움이 세상을 밝게 혹은 다르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명제 등을 던지고 있다”고 전했다.

고연옥 작가가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지점이 있는 배우’라고 언급한 김영민에게 딱 맞는 ‘갈매’ 옷을 입은 듯 하다. 김영민 배우가 아니라면 7년간 칼도 꺼내보지 못한 채 느려터진 무사, 의무를 자꾸 미루는 영웅에게 누가 연민을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5월 12일까지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 오른다. 배우 김영민, 김정호, 윤상화, 박완규, 박윤정, 박상종, 박용, 박미현, 김정환, 이윤재, 한명일, 마두영, 변민지, 주재희 출연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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