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령화가족>을 뭉치게 하는 놀라운 ‘밥상’의 힘
- 막장 집안을 통해 본 모성적 가족의 의미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고령화가족>은 천명관 작가의 소설을 송해성 감독이 영화화한 막장 가족영화이다. 영화는 박해일, 공효진, 윤제문, 윤여정, 진지희 등 배역에 꼭 맞는 캐스팅과 노련한 연출로 시종 유쾌함이 살아있다. <고령화 가족>은 생생한 캐릭터들의 난타전을 통해 ‘콩가루 집안’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되는 훈훈한 결말을 보여준다.

아내는 바람이 났고, 영화는 말아 먹은 영화감독 인모(박해일)가 방세독촉을 받다가 충동적으로 목을 매려는 순간, 닭죽을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짐을 싸들고 엄마의 집에 오지만, 그곳엔 이미 엄마에게 얹혀살고 있는 형(윤제문)이 있다. 출소한지 얼마 안 된 삼류건달인 형은 지금은 동네에서 하릴없이 소일하는 백수이다. 대학물까지 먹은 동생이 엄마에게 얹혀살러 왔다는 상황이 못마땅한 형은 끊임없이 인모에게 시비를 걸고, 설상가상으로 여동생 미연(공효진)이 딸(진지희)을 데리고 두 번째 이혼을 하겠다며 친정에 들이닥치자, 이제 엄마의 집은 중년에 접어든 삼남매와 중학생인 외손녀가 지지고 볶는 북새통이 되었다.

이들은 여느 가족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예의를 갖춰 말하지 않는다. 반말과 쌍욕은 기본이고, 몸싸움도 불사한다. 영화는 막장 콩가루 집안의 속내를 후련하게 보여주며, 결정적인 순간에 취하는 이들의 행보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음미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첫째, ‘고령화가족’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는 ‘늙은 부모에게 얹혀사는 중년의 자식들’을 그린다. 과거 바람직한 노년의 모습은 각자 자신의 일과 가정을 꾸린 자식들에게 효도와 봉양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런 노년을 누리는 사람은 계층을 막론하고 보기 힘들다. 높은 실업률과 이혼율, 낮은 결혼률과 출산율 등으로, 자식세대는 아예 일과 결혼에 진입하지 못하였거나 진입했더라도 다시금 실직이나 이혼의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즉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채 얹혀 살아가거나, 실직이나 이혼 등의 실패를 겪으며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들이 많아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행히 늙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집과 경제능력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고령화 가족>의 어머니는 방이 세 개인 낡은 연립주택에 살며, 화장품 외판을 다닌다. 어머니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40대인 두 아들보다 사회경제적 능력이 앞서는데, 이는 확실히 변화된 노년 상이다. 즉 전체 노동인구의 1/3 이상이 50대 이상의 연령층이고, 50대의 경제활동인구가 20대의 경제활동인구를 넘어선다는 ‘고령화 사회’의 현주소를 명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성년의 자식을 부양하는 노년의 모습은 낯선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둘째, <고령화가족>에서 가족 간 갈등이 격해지면서 폭로되는 비밀은 꽤 굵직하다. 장남은 전처가 데려온 자식으로 “아예 생판 남”이고, 막내딸은 엄마가 바람을 피워 낳은 혼외자이다. 막장드라마의 기본인 출생의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이지만, 영화는 그저 머쓱한 기운이 감돌뿐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 인모는 엄마가 동네 영감에게 몸을 팔고 다닌다고 폭로하지만, 엄마는 ‘사랑’이라고 해명하며 막내딸의 생부를 집에 데려와 인사시킨다. 조카의 팬티를 뒤집어쓰고 자위행위 하는 삼촌의 모습은 뜨악하지만,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무마된다.

<고령화가족>은 혈연과 성적 순수성을 기반으로 삼는 부권적 가족의 개념에 흠집을 내며, 가족에서 중요한 것은 혈연과 성적 순수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가족의 탄생>에서 ‘생판 남’인 자식을 키우며 사는 모습이나 <좋지 아니한가>에서 장남이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별 것 아닌 듯 눙치며 지나가는 것 등과 더불어 가족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맥락으로 읽힌다.



셋째, 영화 속 가족들은 만나면 죽일 듯이 서로 싸우지만, 외부 사람들과의 관계에선 대단한 결속을 드러낸다. 또한 진짜 위기의 순간에는 의리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형제는 여동생의 이혼을 막으려 매부를 만나 화해시키려 하지만, “피가 더럽다”는 말 한마디에 벽돌을 날린다. 여동생이 데이트성추행을 당하는 것이 의심되자 오빠는 벽돌로 차창을 깨고 남자를 개 끌듯 끌고 나온다. 가족 간에 서로의 인생을 비난하며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옆 테이블과 시비가 붙자 미친 듯이 패싸움을 벌인다. 막장 콩가루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 고아출신인 미연의 애인은 진심 부러워하고, 어머니는 흐뭇해한다. 어린조카는 결정적인 순간에 삼촌의 체면을 지켜주고, 삼촌은 그런 조카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늘 동생을 비웃고 때리는 형이었지만, 남들 앞에선 동생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나, 동생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연도 찡한 울림을 던진다.

넷째, 영화는 모성과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개념을 품고 있다. 영화 속 집안의 구심은 어머니이다. 그는 실패하고 굴러들어온 하자투성이 자식들에게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매일 고기를 해 먹인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은 식사장면인데, 이는 ‘가족, 식구’라는 것이 ‘같이 먹는 입’, 즉 밥상공동체임을 의미한다. 엄마는 자식을 먹이는 자이다. 한자의 엄마(母)는 여자(女)에 젖을 그려 넣은 글자이고, 영어의 맘마(mamma)는 엄마이자 젖이다. 즉 엄마는 젖이고, 곧 밥을 의미한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밥을 해먹임으로써 자식들을 불러들이고, 품안에서 그들이 실패를 딛고 느긋한 호흡으로 새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준다. ‘먹이는 모성’은 익숙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특이할 점은 ‘먹이는 모성’이 결코 자신의 여성성을 억압하는 모습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여전히 꽃을 보면 설레고, 옛사랑 구씨 아저씨를 만나 정을 통하는 사이이며, 자식에게 들키자 아예 살림을 합치는 충만한 섹슈얼리티를 지닌 여성이다. 영화 속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카페를 하는 막내딸은 경제적으로나 성적으로나 오빠들보다 우위에 있다. 결혼이 세 번째인 그녀는 오빠들에게 할 말을 다하는 여동생이고, 남자에게 자신의 과거나 집안의 모습을 감추지 않는 당당한 여성이다. 그녀는 또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도 딸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딸에게 욕정을 품은 오빠를 잡도리하거나 가출한 딸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미연의 모습은 강한 모성을 보여준다.

영화 속 다른 여성들도 유능하고 주체적이다. 바람을 피운 인모의 아내는 이혼을 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미용실 수자씨도 자신의 경제력과 사랑으로 백수이자 장애를 얻은 한모를 따뜻이 품는다. 영화 속 어떤 여성도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며,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모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령화가족>이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은 종래의 부권적 가족과 다르다. 부권적 가족은 혈연과 성의 순수성을 바탕으로 가족과 남, 혼내자와 혼외자를 경계 짓는다. 또한 나이와 성차와 항렬에 따른 위계와 예의가 중시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중심이 된 가족에서는 혈연과 성의 순수성이나 위계에 따른 예의는 중요하지 않다. 배다르고 씨 다른 남매라 할지라도 함께 먹고 함께 살며 정으로 뭉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족이며, 서로 솔직한 막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수평적이되 중요한 순간에 의리와 헌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면 그것이 가족이라는 뜻이다. 혈연의 공동체가 아니라, 밥상공동체이자 의리의 공동체로서의 모성적 가족. <고령화가족>이 전하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고령화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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