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디와 운명적으로 만난 성악가들에 ‘브라보’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지난 17일부터 1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2013 대한민국 오페라페스티벌 두 번째 작품 <운명의 힘>은 민간단체의 저력을 보여준 오페라였다.

사립단체의 공연은 대개 외국 유명가수들을 초대하고 기업 단체의 손님으로 객석을 채워 외관만 화려하거나, 그도 아니면 재정이 열악해 지나치게 궁색 맞은 무대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운명의 힘>은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으면서 기본에 충실한 무대를 선보였다. 주역들만 돋보이는 게 아닌 모든 성악가들 및 스태프의 정성스런 마음이 돋보이는 무대라 더욱 반가웠다.

베르디 200주년을 기념해 ‘베르디’와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이 만났고, ‘베르디’와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장수동 대표가 만났다. 그리고 ‘베르디’와 대한민국 성악가 및 관객들이 운명적으로 만났다.

다이나믹한 운명의 전주곡을 리드한 장윤성(군포 프라임필하모닉)의 지휘로 시작된 이번 작품에서 혼연일체의 감동을 준 성악가는 알바로 역 테너 한윤석이었다, 소리위주가 아닌 시(詩)를 읊은 다는 생각으로 관객과 함께 감정을 공유하는 성악가이자,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알바로’였다. 이렇게 되면 운명에 조롱당한 한 남자, 알바로의 '운명의 수레바퀴'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지 않나.

특히 그가 3막의 아리아 저주스런 운명을 한탄하며 '천사 같은 레오노라여'를 부르자 한 남자의 고통스런 운명이 더욱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또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절절한 가슴까지 함께 내 보여준 무대였다. 같은 역을 맡은 테너 이정원의 기품 있고 파워 있는 음색은 호평을 이끌어냈으나 ‘알바로’의 섬세한 내면 연기 부분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다.

긴박한 베르디 음악을 온 몸으로 체화하며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려 했던 ‘카를로’ 역 바리톤 강형규는 감정의 결을 고급스런 음색에 실어 살려냈다. 우정을 나눈 친구, 가족을 배신한 동생을 연달아 죽이고자 했던 한 남자의 기구한 운명에 동참하며 객석과 함께 호흡을 나눠 가진 점이 매력적이었다.

또 다른 ‘카를로’ 역 바리톤 최진학의 무대도 나쁘지 않았으나 객석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뉜 점이 궁금증을 갖게 했다. 마지막 날 공연에서 최진학 ‘카를로’가 등장해서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되면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나와 극 몰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노라’ 역을 맡은 소프라노 이화영은 ‘신이여 평화를’아리아에서 응축된 감정을 피아니시모로 하나 하나 뽑아내며 감동을 선사했다. 소프라노 조경화 역시 매 장면 장면보다 알바로와 긴밀한 호흡을 나눠가지며 훌륭한 가창을 들려줬으나 약음이 다소 섬세하지 못했던 점이 아쉽다.

세 명의 주역과 함께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수도원장역엔 베이스 박준혁과 임철민이 나섰다. 노멀 베이스인 바소 프로폰도 임철민 수도원장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면, 리릭 베이스이자 바소 칸타테인 박준혁 수도원장에게선 자애로운 인간미가 느껴졌다. 두 수도원장 모두 나름의 향취를 내 뿜어 이번 <운명의 힘>에선 2인 2색의 수도원장을 맛보게 됐다.

관객들의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한 바리톤은 멜레토네 역 바리톤 성승민이었다. 다소 어두운 오페라에서 활력을 담당하는 역할 답게 유쾌 호쾌 통쾌한 소리와 연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4회 공연 원 캐스트로 섰음에도 끝까지 지치지 않고 유연한 가창을 들려준 점이 박수를 치게 만들었다. 전쟁을 찬미하는 집시여인 프레지오질라 역 메조소프라노 김선정과 최승현의 탁월한 무대 장악력도 돋보였다. 보다 경쾌한 김선정의 소리와 저음의 매력이 살아난 최승현 모두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18세기 말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페라 <운명의 힘>은 <가면무도회>,<돈 카를로>와 더불어 ‘베르디의 3대 격정의 휴머니즘 오페라’로 불린다.



< 운명의 힘 >(La forza del destino)은 인간이 겪은 매 순간의 선택과 오해가 낳은 ‘운명이라는 힘’에 농락당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고뇌를 심리적으로 잘 묘사한 작품이다. 운명의 힘에 이끌려 신분을 숨긴 채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세 명의 주인공은 4막 내내 죽음과 저주의 수레바퀴 밑으로 처절하게 굴러 들어간다.

최지형 연출과 오윤균 무대디자이너는 교회의 모양을 가진 그리스 반원형 극장을 무대 장치로 내세워 매 막마다 회전무대 위에 운명의 힘 앞에 놓인 인간군상들을 불러냈다. 죽고 죽이고 상대를 저주하는 운명의 회전판 안에서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메타포를 살려낸 장치였다. 하늘의 진노, 신의 저주를 실감나게 들려 준 장윤성 지휘자의 운명적 타격도 극 몰입에 일등공신이었다. 베르디가 말하고자 했던 ‘희생’과 ‘용서’에 대한 운명적 힘이 객석까지 전달된 오페라로 기억될 듯 하다.

테너 이정원 한윤석(돈 알바로), 바리톤 강형규 최진학(돈 카를로), 소프라노 이화영 조경화(레오노라),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최승현(프레지오질라),베이스 박준혁 임철민(구아르디아노), 베이스 심기복 윤성우(칼라트라바). 바리톤 성승민 (멜리토네), 메조소프라노 원경란 소프라노 박선정(쿠라), 테너 임정혁 (트라부코), 베이스 이준봉 김현민(알카데),바리톤 정준교 홍현준(군의관), 그란데 합창단이 출연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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