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이 새롭게 도전한 그리스 비극의 창극화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믿었던 남편에게 배신당한 ‘메디아’는 그 고통으로 인해 남편의 새로운 여인인 공주를 불태워 죽이고, 공주의 아비도 살해한다. 이어 생살을 찢는 고통을 감수하고 낳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을 제 손으로 찔러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이 살인을 원했기에! 난 당신을 위해 칼을 뺐다. 훗날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 날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 날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악녀라 오해해도 좋다. ‘이해’란 가장 현명한 오해고 ‘오해’는 가장 적나라한 이해이니까. 내 본성은 고통 속에서 자란 것 뿐, 난 아이들과 행복을 바랬던 평범한 여자였다”고.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 송-스루(song-through) 창극 <메디아>가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막을 내렸다. 창극으로 만나는 그리스 비극, 배신이 주는 고통으로 인해 할 말 많은 여인이 된 <메디아>는 관객의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메디아’로 분한 서애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빼앗기는 절망,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살아간다는 아픔, 무서움과 비통이 뒤섞인 한탄,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더 커지는 고통과 죄책감을 가슴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한 서린 절창과 구음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그렇게 ‘도살장 같은 아수라장’에서 악녀로 오해한 메디아의 한 서린 노래를 적나라하게 이해하게 됐다. 이만하면 ‘창극’의 대중적 성공이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메디아>는 서양연극의 시원인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을 창(唱)으로 표현하는 최초의 창극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졌다.



한아름 작가는 악녀의 원조 격인 ‘메디아’를 새롭게 조명했다. ‘메디아’는 본래 조국의 보물을 훔치러온 남자에게 반해 친형제는 물론 시숙부도 살해 교사하며, 급기야 친자식도 찔러 죽이는 팜므파탈의 대명사이다.

창극 <메디아>는 이런 메디아가 ‘과연 본성이 악한 여자였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남편을 위해 악행을 뒤집어쓰지만 결국 버림받아 극단의 선택에 몰리는 여자’로 ‘메디아’를 해석했다.

한 작가는 “부성은 흔들릴 수 있으나 모성은 그러면 안 된다는 남자들의 이기심은 수천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편의 잘못을 아내에게, 아이들의 잘못을 엄마에게, 아들의 잘못을 며느리에게 돌리고 있지 않나? 수세기 동안 시대의 악녀로 기록된 메디아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한 서린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작의를 밝혔다.

<메디아>는 음악의 비중이 매우 큰 창극이다. 작곡가 황호준은 총 10장에 걸쳐 전체적으로 연주되는 100분가량의 방대한 음악으로 창극 역사상 전례 없는 송-스루(song-through) 창작 창극을 탄생시켰다.

전통적 창극의 도창과 유사하게 그리스 비극의 특징 중 하나인 코러스(chorus, 합창단)를 활용했다. 관객은 그리스 비극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창극’에서 첫째로 소리를 먼저 즐기고, 그 속에서 극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소리가 보이는 창극’을 만나게 된 것.



‘바라던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바라지 않던 일이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코러스 장의 말을 들으며 관객은 극의 정서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 사이 사이 “죄를 짓는 것은 남자. 하지만 벌을 받는 것은 여자"란 말이 반복적으로 들린다.

이는 창극 <메디아>가 극이 먼저이고 창이 나중인 ‘극창(劇唱)’이 아닌 창이 먼저인 ‘창극’이라고 생각하는 서재형 연출의 의지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메디아>의 무대는 한 서린 여성의 자궁 혹은 남성의 권력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입체형 박스이다. 박스형 무대의 사방 벽에 핸디캠을 사용한 인터랙티브(interactive) 실황 영상을 투사, 극의 전개에 따른 갈등과 내면의 변화를 시각화했다. 또한 천정 중간 중간엔 구멍이 뚫려 있어 날카로운 고통의 비명을 엿듣게 했다. 마름모 꼴의 구멍에서 빨간 천이 ‘우수수’ 내려올 땐 마치 ‘메디아’의 피 눈물을 보는 듯 했다.

팝핀 협준의 아내 박애리와 국립창극단 신입단원 정은혜가 악녀 메디아를 새롭게 재조명했다. 나쁜 남자 이아손 역의 김준수와 악역을 하면 더욱 빛나는 김금미, 힘 있는 소리의 이연주(코러스장), 딸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다 같이 저승길로 가는 크레온 역의 윤석안과 크레우사 역 민은경, 구슬픈 소리와 표정으로 모성을 자극한 송나영 안연주(아이들) 등이 출연 해 ‘창극’을 보는 가치와 재미를 더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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