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엘리트들의 백색 전쟁이 주는 공포와 불안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돌곶이가 선보이는 창작극 시리즈’로 첫 선을 보인 연극 <모범생들>(작 지이선ㆍ연출 김태형)은 ‘모범생들의 학업이나 품행’이 아닌 숨겨진 욕망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분상승의 욕망을 채우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상당히 날카롭게 관객의 마음을 할퀸다.

고교시절 컨닝을 모의했던 중산층 장남 ‘명준’은 10년 뒤 회계사가 되고, 묻어가는 인생 ‘수환’은 결국 수완 좋은 정치인 보좌관의 인생을 살게 된다. 상위 3%와는 급이 다른 상위 0.3%를 부르짖으며 ‘돈’으로 공부하던 반장 ‘민영’은 정의로운(?) 검사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들은 모두 명석함은 기본 비열함은 필수인 우리 시대의 ‘모범생들’의 면면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모범생들> 무리에 끼어주기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마음이 불편한 단순무식 의리남 ‘종태’는 어떤 어른이 됐을까? 명준과 수환에게 이용당해도 애써 ‘우정’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였던 종태의 10년 뒤 모습은 서울 도심에서 떨어진 외각의 카센터 사장이다.

뭔가 씁쓸하다. <모범생들>의 내면에 발을 담그지 못한 종태의 모습은 이 시대 또 다른 소시민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난 평등이란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너희들이 군대 갈 때 나는 어학연수 갈 거고, 너희들이 취직하면 난 회사를 차릴 수도 있어. 어쩌면 나는 슈퍼맨도 될 수 있어. 이 학교가, 저 교문 밖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이 순진한 새끼들" 민영의 독설이 결코 틀리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에 편치 않을 것이다.

연극은 명문고 고등학교 3학년 교실과 10년 뒤 결혼식 현장을 번갈아 가며 장면을 전환한다.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비열했던 이들은 사회에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범생을 위시하며 각자의 역할을 분담해 컨닝을 계획하고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상대방을 자신의 편으로 유입한다. 실제 사건이 커지자 ‘의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최후의 보류인 친구를 방패막이로 이용한다.



민영 명준 수환이 학교와 사회 모두에서 ‘모범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심리전에 능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를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강자와 연대하는 비열한 심리전이다. 고교시절 심리전에 능했던 이들은 성인이 돼 우리 사회의 상류층과 지도층에 편입해 이 사회를 지탱해 간다. 연극이 간파 한 점 역시 이 지점이다.

나이만 먹었을 뿐 달라진 게 없는 세 친구들의 교복이 순식간에 남성 정장으로 바뀔 때, 구하기 힘들다는 한정 판매 만년필 몽블랑을 죽자고 구해서 손에 넣는 명준의 속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을 때, 모든 더러운 돈을 깨끗하게 보이게 만드는 흰 봉투의 의미를 알게 될 때, 눈 부시게 하얀 와이셔츠(드러나지 않은 제2 제3의 모범생들)가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때, 관객은 ‘백색 전쟁’을 치르게 된다. 누구 하나 피 흘리는 이 없지만, 변하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마음만은 바짝 바짝 타들어간다. 아니 이런 백색 현실이 공포로 다가온다.

4개의 책상과 의자, 접었다 펴는 세트 만으로 상상의 공간을 깔끔하게 채워 낸 <모범생들>의 나머지는 남자 배우 4명이 채운다. 특히 종태 역 배우 박훈의 새로운 캐릭터 설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그저 단순 무식한 종태라기 보다는 모범생들의 심리를 하나 하나 알아가고 있는 인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종태가 1년만 더 특목고에서 고교시절을 보냈다면 보다 상위레벨의 직업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게 됐다. 또 다른 종태 역 배우 임준식은 전작 ‘히스토리보이즈’의 대사를 하는 장면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공감의 웃음을 흘리게 했다.

김태형 연출가는 “이전 시즌 공연에서는 친구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욕망에 신경 썼다면 올해는 주인공들의 불안과 공포에 더 집중했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연극 <모범생들>은 오는 9월 1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배우 장현덕 윤나무(명준), 김대현 정순원(수환), 박 훈 임준식(종태), 박성훈 김성일(민영)이 번갈아 가며 출연한다.

“음악을 잘 하면 음악가가 되고, 운동을 잘 하면 운동선수가 되는데, 공부를 잘 하면 뭐가 될까?” 그 답이 궁금하다면 연극 <모범생들>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이다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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