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반딧불이’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아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유럽에서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을 ‘천사의 사다리’라고 한다. 여기 천사의 사다리를 오르려다가 떨어진 안타까운 인간들이 모여 있는 선착장이 있다. 죽는 것도 안타깝고 그렇다고 사는 것도 안타까운 인간 군상들이 잠시 머물기 위한 나룻배가 띄워진 곳이다.

주목할 점은 이 곳 선착장에 탑승한 이들의 얼굴엔 눈물 꽃과 함께 웃음 꽃이 핀다는 사실. 혼자 있어도 외롭고, 둘이 있어도 외롭지만 <가을 반딧불이>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은 보너스다. 이제부터 분페이의 귀신 인생이 시작되듯 그동안 삶에 힘들었던 관객들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부여받고 극장을 나서니 말이다.

정의신 작가의 한국 초연작 <가을반딧불이>는 소시민 혹은 사회적으로는 루저인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으로 탄생하는 좌충우돌 스토리를 담고 있다.

연극을 2회 보고 나서 든 짧은 감상은 “거북하지 않아 쏘 굿 연극”(사토시의 애드리브인 거북이와 소(beef) 굿에서 따옴)이다. 또 한 가지는 “연극의 힘을 알게 한 트라이 투 리멤버 ‘가을 반딧불이’ 였다. 콧노래로 흘러나오는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 선율 역시 연극과 함께 기억 될 것 같다.

등장인물은 총 다섯 명.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하는 주인공 ‘다모쓰’, 조카 ‘다모쓰’를 걷어 키우면서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 삼촌 ‘슈헤이’, 아침형 귀신이자 소심증 아버지인 ‘분페이’, 그리고 이들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더부살이 인생인 ‘마쓰미’와 ‘사토시’가 그들이다.

정의신 작가의 작품이 그러하듯 다섯 명 모두가 주인공이다. 이들이 아웅다웅 다투면서 상처를 꺼내놓고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 전골과 국수를 나눠 먹으며 정이 들어가는 과정이 정겹다.



선착장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선 출렁거리는 인생을 닮은 흔들다리를 건너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심사가 뒤틀려 있는 청년과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 절둑거리는 다리만큼 힘든 인생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 삼촌 모두 이 다리를 건넌다. 더부살이 인생이지만 씩씩한 두 남녀 역시 이 흔들다리를 지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게 된다.

진지한 듯 생기 반짝이는 정의신 식 유머와 사토시 역 배우 이도엽 그리고 슈헤이 역 배우 조연호의 애드리브가 더해져 극의 감칠맛이 더해졌다. 장 전환을 위한 암전시 객석에선 웃음을 참지 못한 관객의 키득거리는 소리와 박수를 함께 들을 수 있는 참 밝은 연극이다. 극 중 직접 만날 수 있는 입에서 살살 녹는 슈크림 빵, 쫄깃한 찰떡과 함께 기억될 연극이다.

물 위의 선착장은 작은 소동극 사이에서 인물들의 상처 혹은 눈물이 되어 반짝였다. ‘가족이란 건 모두 거짓으로 이어져 있는 거였어’라고 말하는 슈헤이의 상처 역시 일렁거리는 물결 위에서 작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하루 하루 시간에 쫒기면서 사는 고달픈 현대인들이라면 대통령도 범접할 수 없는 ‘시간 부자’ 사토시가 부러워 질 것 같다. 시간이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흘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반추해보며 누군가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연극은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그저 팬티 널고 있는 한 아저씨의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을 참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 씩씩함 뒤에 감쳐진 외로움은 더욱 코 끝을 찡하게 한다.

살생을 엄청 하니까, 아름답게 빛난다는 ‘가을 반딧불이’처럼 상처가 많은 인간들은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후반에 만날 수 있는 반짝이는 반딧불이 불 빛과 무지개는 그 자체로 관객의 체온을 덥혀준다. 무대 전면을 지휘하기 보단 무대 뒤를 안정적으로 감싸 준 김제훈 연출가의 따뜻한 시선도 읽혀진다.

배우 조연호, 김한, 이도엽, 배성우, 이항나 이현응이 출연한다. 누구 하나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는 6월 30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이후 2013 통영연극예술축제 참가작으로 선정 돼 7월 20일 한 차례 더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극단 조은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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