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고뇌와 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하다

[엔터미디어=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2006년 ‘무용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안무가상을 수상한 보리스 에이프만의 발레 <차이콥스키>는 천재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현실과 내면을 드라마발레로 승화시킨 작품.

차이코프스키의 인생을 대변하는 주옥같은 음악 안에 예술가의 고뇌와 동성애적 열망과 죽음을 격정적 안무로 풀어냈다. 공상과 현실의 혼돈이 예술가의 생애와 드라마적 구성과 맞물리며 관객의 무의식까지 자극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E단조, 성요한 크리소스톰의 전례가, 현을 위한 세레나데 2•3악장, 이탈리아 카프리치오, 교향곡 제6번 B단조 ‘비창’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관객들은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에 빠져 들어갔다.

2013년 국립발레단 정기공연 발레 <차이콥스키 :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가 지난 달 28일부터 30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 올랐다.

발레 <차이콥스키>는 역순행적인 구조로 진행된다. 첫 장면은 죽음을 앞둔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병상에서 환영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이다. 창작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그 앞에 나타난 환영들은 그가 만든 발레음악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마녀 카라보스와 차이콥스키와 같은 모습을 한 자신의 분신, 또는 자신의 아내인 밀류코바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분신이자 내면이 흑조의 모습을 하고 흑조 군무들과 함께 등장해 차이콥스키를 괴롭히는 장면도 만날 수 있다.



보리스 에이프만의 발레 <차이콥스키>는 연극의 탄탄한 몰입도, 뮤지컬의 스펙타클함, 클래식 공연의 청각적 희열, 발레의 상상력 가득한 몸짓이 더해져 1석 4조의 기쁨을 선사했다. 스토리텔링와 상상력, 스펙타클 모두를 갖춘 발레였다.

발레 <차이콥스키>는 주인공 차이콥스키와 그의 분신을 나란히 등장시킨다. 분신은 아내 밀류코바를 미워하며 결혼을 끝장내고 싶어하는 차이콥스키의 내면을 상징한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자기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는 차이콥스키는 늘 분신과 다툰다. 극중에서 분신은 아내와 더불어 차이콥스키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여인인 폰 멕 부인은 차이콥스키가 지휘봉을 잡도록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차이콥스키' 역을 맡은 발레리노 이동훈, '차이코프스키 내면' 역을 맡은 발레리노 박기현은 상대와 긴밀한 호흡을 주고 받으며 강약을 조절하는 테크닉을 선보였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분신이 추는 2인무에서 느낄 수 있는 거침없는 리듬감, 드라마 발레에서 빠질 수 없는 감정연기 역시 촘촘했다. 지휘봉을 차지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두 명의 차이콥스키는 드라마의 결을 살려냈다. 박기현의 악마적 카리스마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며, 폰멕 부인 역의 신혜진의 깊이 있는 캐릭터 해석과 밀류코바 역 이은원의 농밀한 연기와 광기 역시 눈에 들어왔다.



아크로바틱한 테크닉과 특유의 상상력이 가미된 잘 짜여진 안무구성은 이미 지난 2009년 초연에서 호평을 이끌어냈음은 물론 그 열기는 2013년 공연까지 이어졌다. 차이콥스키의 내면을 등장시켜 차이콥프스키의 정신적 혼돈을 표현하는 ‘보리스 에이프만’의 완성도 있는 연출은 예술가 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의 영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특히 보리스 에이프만 특유의 상상력이 극에 달하는 대목은 <백조의 호수>,<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의 주요인물을 차이코프스키와 함께 등장시킨 점. 무용수들이 카드로 변신해 혼란스러운 차이콥스키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후반 장면 역시 기발한 재미를 선사한다.

미니멀한 무대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차이콥스키는 물론 주변 인물 모두를 강력하게 찍어 내릴 것 같은 천장의 날카로운 소품은 아찔했다. 푸른색 붉은색 등이 쓰인 집중 조명은 장면 장면을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카지노씬에 이어 레퀴엠 장면으로 이어지는 차이콥스키의 삶이 마감되는 마지막 장면까지 몰입도 있게 관객을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한 발레 공연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지휘과 주임교수인 지휘자 정치용이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유려한 차이콥스키 선율을 살려냈다. 차이콥스키는 무용수 이영철 이동훈이, 차이콥스키 내면은 정영재 박기현, 밀류코바 부인은 박슬기 이은원, 폰 맥 부인은 유난희 신혜진, 왕자 역은 배민순 이영도, 소녀 역은 신승원 박나리가 나섰다.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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