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키고 설킨 인연의 조각보로 그려낸 ‘해품달’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1막의 마지막은 연우의 장례식이 나오는 ‘문이 닫힌다’ 장면으로 막이 내린다. 홍문관 대제학의 딸인 연우는 세자빈에 간택되지만 대왕대비 윤씨의 사주를 받은 무녀 장씨의 주술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된 것. 연우의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고자 훤은 관 앞에서 ‘열어라’ 울부짖고, 그런 훤을 바라보는 양명은 꾹꾹 눌러 담은 눈물 샘이 곧 터질 것만 같아 위태로운 슬픔을 간직한 남자이다.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의 깊은 무대 저 끝에서 등장한 광대꼭두가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무대 위 아래 겹겹이 설치돼 상하 좌우로 움직이는 조각보로 형상화된 죽음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훤, 양명, 연우는 서로를 이은 질긴 인연의 끈 위에서 새로운 영혼의 옷을 갈아입게 된다.

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정은궐 작가의 베스트셀러 ‘해를 품은 달’이 뮤지컬로 돌아왔다. 물론 ‘수현앓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신예 김수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도 빼 놓을 수 없다.

뮤지컬 <해를 품은 달>(대본 작가 박인선, 작곡 원미솔, 연출 정태영)이 지난 6월 용인 포은아트홀 프리뷰 공연과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딤프)을 거쳐, 7월 6일 드디어 서울 공연을 시작했다.

작품에 대해선 평이 반반씩 갈리고 있는 상태. 그래서 지난 일요일 2회 공연을 연속으로 봤다. 첫 공연은 비교적 앞좌석에 앉아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와 드라마에 집중했고, 두 번째 공연은 뒷좌석에 앉아 무대 운용에 신경 쓰면서 감상했다.



처음 봤을 땐 80% 정도만 긍정의 표를 던졌다면, 두 번째 보면서는 90% 이상의 환호를 보냈다. 호감도가 높아진 이유는 한편의 수묵화 같은 무대에 담긴 판타지와 상징성, 제 3의 배우 역할을 톡톡히 해 낸 조명의 재기발랄함 때문이다. 바닥 조명을 다채롭게 이용하고 있는 이번 작품에서 조명은 단순히 무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스터리와 정치극의 요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그래서 아직 공연을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1층 뒷좌석이나 2층에서 관람할 것을 권한다.

조선시대 가상의 왕 이훤과 비밀에 싸인 무녀 월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해를 품은 달>은 판타지 로맨스 사극이다. 여기에 논리적인 잣대만 들이밀며 줄거리 전개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은 별 설득력이 없다. 뮤지컬은 훤과 연우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 양명과 연우의 안타까운 인연에 더욱 포커스를 맞췄다.

장영희 교수는 ‘‘시인은 바로 바람에 색깔을 칠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바람에 시인들이 색깔을 칠해주면 ‘아 그게 빨간색이었구나, 노란색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내 속에는 이런 사랑이 있는데, 혹시 네 안에도 그런 게 있지 않니?‘ 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해를 품은 달>은 뮤지컬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랑이야기를 보러가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작품의 시적 감수성은 주요 넘버인 ‘그래, 사랑이다’의 대사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햇살 되어 나의 창문 비추고, 빗방울 되어 나의 방문 두드리지. 바람 되어 나의 얼굴 스치고 새 소리되어 내게 속삭인 말. 그래, 사랑이다!’



판타지적인 장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서를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나비의 날개 짓으로 그려낸 연우의 내면이 훤을 만나 어여쁜 꽃밭으로 변신하는 장면, ‘보슬비’란 뜻을 가진 연우와 그녀를 그리워하는 훤이 쉬 그칠 것 같지 않는 보슬비가 내리는 8년 뒤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되는 2막 장면, 은하철도의 수 천개의 별이 연상되는 로맨틱한 장면 등이 그러했다.

그 사이 사이 초승달과 반달을 거쳐 보름달로 모양을 달리하는 달의 영상, 서자로 태어나 훤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양명이 안타까운 마음을 유달리 밝은 모습으로 감추다, 마지막에 가서 수천개의 별 빛으로 내비칠 때 깊은 울림을 준다.

성장하는 배우의 발견도 기쁨을 줬다. 드라마와 달리 빠르게 전개되는 뮤지컬 속에서 전동석(훤)은 이제 막 사랑에 눈 뜬 소년의 풋풋함과 사랑스러움, 왕좌에 올라 사랑하는 여인만이 아닌 백성까지 돌 봐야 무게감을 1막과 2막에서 차별성을 기하며 보여줬다. 지금까지 전동석의 가창력은 높이 샀지만 연기력이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번 작품이 그를 한 뼘 성장하게 한 듯하다. 그의 차기작 뮤지컬 <엘리자벳>에 거는 기대감도 커졌다.

또 다른 왕으로 분한 배우 김다현 역시 노련하게 주인공을 소화해냈다. 연우에 대한 마음을 상징적으로 내 비친 ‘저 분은 태양’, ‘악몽’ 장면에서의 연기 호흡 조절은 단연 으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다작을 한 탓일까. 여러 이미지가 겹쳐 보인 점이 신선미를 반감시켰다.



사랑을 품은, 아니 달을 품기 위해 결국 밤 하늘의 별이 된 양명 역을 한 배우 조강현과 성두섭의 캐릭터 색도 매력이 가득했다. 조강현은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유머와 위트로 무장했다면, 성두섭은 애절한 눈빛을 미소로 애써 감춘 듯 했다. 그럼에도 사랑과 명예, 그 어떤 것도 허락 되지 않은 한 남자의 비애감이 여성 관객의 모성 본능을 불러 일으킨 점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무녀 장씨로 나온 배우 최현선의 카리스마와 안정적인 가창도 눈에 띈다.

국악과 양악이 다채롭게 배합 돼 팝 오케스트라 콘셉트로 풀어낸 33개의 뮤지컬 넘버, 무대세트(오필영)와 조명(구윤영), 영상디자인(박준), 안무(정도영)의 존재감이 빛난 뮤지컬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정치를 익힐 것’을 이야기하는 붓글씨가 배합된 영상 장면, 탈춤, 부채 춤 등이 국내 관객 뿐 아니라 해외 관객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듯 보인다.

<해를 품은 달>은 31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이후 8월 대구, 부산을 비롯한 지방공연, 12월 일본 동경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배우 김다현 전동석(훤), 성두섭 조강현(양명), 전미도 안시하(연우), 송영창 정용현(부왕), 지혜근(윤대형), 최현선(무녀 장씨), 염성연(허염), 이한솔(민화공주), 최보영(설), 서홍석(운), 조용기(차내관), 박규원(허민규), 한진 이은진,(꼭두), 고은영(보경). 송진우, 백민수, 최도선, 홍순국, 김태형, 오경석, 김선영, 김지희, 신세계, 최예나, 윤소미, 조은숙, 강은애가 출연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마케팅컴퍼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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