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주제가 없으면 안 되나? 난 주제가 있는 공연이 부담되던데… 란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다.” 작가 민준호

연극을 보고 나서 작가나 연출의 변을 읽는 걸 좋아한다. 그들이 펜대를 잡는 순간, 연출 그림을 그리는 순간 느꼈을 고민이나 상념의 줄기를 조금이라도 함께 느껴보고 싶어서다.

그런데 민준호 작가는 ‘주제가 있는 공연이 부담됐다’는 말을 먼저 했다. 또한 작가 본인이 실제 자신과 할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놓은 작품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공연장에서 난 세 명이다. 준희, 작가 그리고 객석의 나. 셋 중에 누구도 앞으로 가려하지 않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니, 이 공연에 대한 평은 양쪽으로 갈릴 것 같았다. 특히 주제 찾기 좋아하는 글쟁이들의 성엔 차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꾸 마음이 가니 말이다.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멜로드라마를 쓰고 싶은 희곡작가 손자 준희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관찰하며 신작을 준비하는 데서 시작한다.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내는 할머니와 이에 지지 않고 똑같이 받아 치는 할아버지, 그리고 중간에서 양쪽을 정신없이 오가는 손자, 준희의 미래 모습인 동시에 극 중 화자 역할을 하는 작가 이렇게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할아버지의 첫사랑을 찾는 여정에 동행한 손자는 할아버지를 도와준다는 마음도 한 켠에 있지만, 작가로서 멜로 드라마가 완성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함께 갖고 있는 인물이다. 연극은 준희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한 듯 준희 역과 작가 역을 따로 설정해놨다.

어찌보면 짬짜면 같은 연극이다. 짜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은 그 심리가 여기에도 적용되니 말이다. 관객들은 연극적 장치로 극대화되다 결국엔 메시지를 남기는 극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의도된 연극적 장치들에 거부감이 생겨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극이 보고 싶기도 한다.

<나와 할아버지>는 ‘나와 할아버지’의 시각에서 보면 ‘한 편의 수필을 읽듯’ 담백하고도 따뜻한 연극이지만, ‘작가와 할아버지’ 시각에서 보면 발칙한 연극이다. ‘작가’라는 존재로 인해 민준호 연출 특유의 유머와 작가로서 고민이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극중 ‘나’인 준희 보다 대사 분량은 물론 동선 역시 어마 어마한 이 작가라는 인물은 멀티맨과는 또 다른 의미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빈다. 작가의 머릿 속을 관객들에게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같은 존재이다. 연극은 더 나아가 작가를 실제 내비게이션 역으로 초빙하기도 한다. 바퀴 달린 세트가 화물차가 되는가 하면, 여관, 병원으로 변신한다.

연극의 전반이 가벼운 수필적 터치가 느껴졌다면, 후반은 미세한 울림을 주는 단편 소설처럼 다가왔다. 국가 유공자 할아버지에 대해 할머니가 느꼈을 마음을 ‘훈장은 없어도 다리는 있어야지’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해냈다. 그리고 50년 된 할아버지의 신발과 4년마다 의족을 갈아야 하는 이유, 요강 사건까지 함께 느끼고 걸어나갔다.

연극은 ‘연극적 장치들로 전달되기 보다는 마음으로 전달되는 게 진짜’라는 믿음이 있다. <나와 할아버지>는 쫙 빼 입은 고급스런 연극은 분명 아니다. 준희가 할아버지 목소리를 녹음한 걸 다시 들으면서, 결국 숨겨진 마음을 느꼈듯, 관객들도 연극 속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난 뒤 실제 할아버지의 삶을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포스터 사진 속의 군화 위에 핀 들꽃의 가치, 6시, 12시 다시 6시 삼시 세끼를 꼬박 꼬박 챙겨드시는 할아버지의 밥 힘, 소중한 추억을 숨겨줄 수 밖에 없었던 잔소리쟁이 할머니의 마음이 만져진다.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이하 ‘간다’)의 상임연출인 민준호가 지난 2월 남산 희곡페스티벌에서 낭독공연으로 먼저 선 보인 작품이다.

배우 진선규 오용(할아버지), 정선아 손지윤(할머니), 오의식 홍우진(준희), 이석 양경원(작가)이 출연한다. 오용 배우가 분한 할아버지는 자꾸 지팡이 든 손이라도 잡아드리고 싶어지는 정감이 있는 할아버지였다. 양경원 배우의 능청맞음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궁금해지는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8월 4일까지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스토리P,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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