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옛날에는 무대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배우한테는 무대가 그냥 인생이야. 먼지가 후회처럼 쌓인 여기 바닥들이, 막이 내려가면 생을 다하는 며칠짜리 목숨의 이 세트들이, 단 하루도 햇빛을 받지 못해 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사방의 컴컴한 벽들이, 조명이 없으면 평생이 암전인 바로 여기가…, 여기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 무대가 내 인생이야! 이 모든 게 바로 나야. 이게 내 진짜야. 무대가 인생을 베낀 게 아니라 무대 자체가 내 인생이라고.”

7월 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안녕, 마이 버터플라이>는 박춘근 작가가 데뷔 50주년을 맞은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 손숙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 무대, 연습실, 분장실 그리고 배우의 실제 삶이 뒤엉킨 '극 속의 극' 이다.

여배우의 삶을 통해 보는 우리네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들쳐보는 이번 작품은 연극무대에 인생을 바친 스타 여배우 김정숙(손숙)이 50주년 기념 연극을 올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극 안에 또 다른 극이 들어있는 극중극 형식이다. <안녕, 마이 버터플라이> 작품 안에는 연극 <굿나잇, 마더>를 준비하는 배우와 연출이 있고, 연극 속에서 상처를 마주하는 엄마와 아들 그리고 딸이 있다.

웃음 속에 눈물이 묻어나는 연출가 윤정환이 함께하는 <안녕, 마이 버터플라이>속에선 작가의 연극, 연극을 위한 연습으로서의 연극, 배우가 만들어내는 연극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특히, 미국 여성극작가 마샤 노먼의 <굿나잇, 마더>(잘 자요 엄마)가 극 중 김정숙, 더 나아가 배우 손숙의 실제 삶과 맞물리며 몰입도를 높인다. 실제 손숙은 5년 전 연극열전 시리즈로 기획 된 연극 <잘 자요 엄마> 무대에 오른 바 있다.



<잘 자요 엄마>와 <안녕, 마이 버터플라이>는 다른 듯 닮아있다. 삶의 고통을 겹겹이 껴안고 살아가던 딸 ‘제시’는 어느 날 엄마 ‘델마’에게 자살을 선포한다. 김정숙은 죽은 딸을 대신한 여배우 유인나의 모습에서 내내 소통하지 못하며 살아왔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연습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나는 네가 내 것인 줄 알았어’ 대사가 극중극을 넘어 가슴을 관통하면 몰입도는 더욱 높아진다.

배우라면 무대에 올라가 자신의 실체를 100% 보게 되는 고통의 순간이 오게 된다. 화려한 조명 너머 캄캄한 어둠도 견뎌야 한다. 김정숙도 손숙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숙의 분신이었던 나비 모양 펜던트는 항상 죽음을 간직한 채 치열하게 살아왔던 여배우의 고통의 자존심이었던 것.

아들이자 연출가인 오민영의 대사에서 제목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무대가 진짜인 적 있어요? 인생을 베껴다가 가짜로 만들어진 소품과 조명에 둘러싸여서 진짜 인생을 잃어버리신 거라고요!” 결국 연극의 말미 버터플라이 펜던트에게 안녕을 고하고 김정숙은 진짜 인생을 찾게 되니 말이다.

<안녕, 마이 버터플라이>는 3대에 걸친 굴곡진 삶을 담아내고 있다. 내내 소통하지 못하며 살아왔던 엄마와 딸의 이야기 속에서 또 한 명의 김정숙 또 한명의 지영이, 또 한명의 손숙이 보인다. 주인공 손숙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대가 인생의 축소판이 아닌 무대가 그냥 인생인 연극이었다.



연극은 마지막까지 ‘묘한 연극’의 색채를 유지했다. 희곡에 쓰인 대로 말해야 하는 배우의 ‘배(俳)’자를 한자로 쓰면 사람 인(人) 변에 아닐 비(非). 풀이하면 인간도 아닌 인간. 근데 그 인간도 아닌 것이 인간을 걱정한다. 그런데 어떻게 배우가 낙이 되겠어?, 란 질문도 빠뜨리지 않는다.

배우이기 전에 여자였고 딸이었고 어머니였고 사회인이었던 손숙의 속살이 언뜻 언뜻 비춘다. 무대 위 연극과 무대 뒤 삶이 중첩되고,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전개 돼 관객들로 하여금 ‘어디까지가 손숙 개인의 이야기일까’ 궁금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인공이 배우 박정자씨의 음색을 흉내내는 장면, 거침없이 내 뱉는 욕설 장면의 호응도 좋다.

연극은 “우리 삶에는 각자의 대본이 있음”을 이야기하며 끝맺는다. 희곡에 쓰인대로 말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배우 김정숙, 50년 연극인생을 ‘연극’으로 말한 배우 손숙, 그 연극을 통해 인생을 경험한 관객은 진한 정(情)을 나눠가졌다.

‘SNL 코리아’에 출연하며 개성만점 연기파배우로 자리매김한 배우 김원해, 연극 <에이미>, <밤으로의 긴 여로> 등 작품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서은경이 제 몫을 해 낸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플래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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