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보다 죽음이 더욱 빛난 ‘엘리자벳’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지난 달 2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개막한 뮤지컬 <엘리자벳>(Das Musical Elisabeth)이 달라졌다. 로버트 요한슨 연출이 ‘엘리자벳’의 일대기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보일 수 있도록 개연성 있는 장면구성에 신경 쓴 느낌이다.

우선, ‘엘리자벳’을 평생 따라다닌 죽음(독일어로 Tod)의 그림자에 힘을 실었다. 초연의 ‘죽음’이 ‘판타지한 존재’에 방점이 찍혔다면, 2013 ‘죽음’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가 더 잘 어울려 보였다. 공식적인 변화는 1막 2장 ‘모두 반가워요’ 넘버 안에 ‘사랑과 죽음의 춤’을 함께 녹여낸 점.

2012년 초연에 비해 ‘죽음’의 스토리가 보강됐다. ‘죽음’은 11미터에 달하는 브리지(Bridge) 뿐 아니라 공중에서 외줄을 타고 나타나 죽음의 종을 치는가 하면, ‘죽음’을 항상 따라다니는 죽음의 천사들은 인형 같은 황실생활을 표현 한 ‘결혼의 정거장들’ 넘버에서 마리오네트 줄을 조정(초연 땐 루케니가 줄을 조정 함) 한다. ‘엘리자벳’의 슬픔마저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비엔나의 카페 종업원에 이어 역할이 더 커진 것이다.

지금까지 화려한 미술과 의상 및 무대로 호평을 받은 <엘리자벳>의 약점으로 지적된 건 다소 헐거운 내러티브였다. 2013 재연 공연을 관람하고 나니, 제작진 역시 그 부분을 다각도로 고민한 흔적이 엿 보였다.

‘엘리자벳’(옥주현 김소현)과 그녀의 남편 ‘프란츠 요제프’(민영기), 시어머니 ‘대공비 소피’(이정화) 그리고 그녀의 아들 ‘루돌프’(어린 루돌프 강동유 최재혁 윤예담, 성인 루돌프 김이삭 노지훈)가 기거하는 합스부르크 왕국은 침몰하는 거대한 배로 형상화됐다.



그 안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엘리자벳’과 ‘루돌프’ 모자는 이리 저리 떠도는 힘없는 조각배에 지나지 않는다. 재연 공연에선 보다 강화된 영상으로 극 이해에 도움을 준다. 실베스터 르베이가 작곡한 불협화음이 인상적인 ‘신이시여 지키소서 우리 젊은 황제’ 등의 속 의미도 감지된다.

인간 해방과 예술의 자유를 강조한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이름을 외치지만 왕실 새장 안에서 영혼이 묶인 엘리자벳, 어미의 따뜻한 품이 너무도 그리워 차라리 ‘내가 당신의 거울이라면’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루돌프의 감정선도 훨씬 잘 읽혀진다. 인물들의 대사를 크게 수정하진 않았지만, 연출의 디렉션에 따라 배우들이 강약을 조절하며 작품의 메시지에 근접해 간 까닭이다. 또한 지난 해 <황태자 루돌프>로 미리 루돌프의 내면을 만나본 결과 극이 보다 다채롭게 다가온다.

‘엘리자벳’에게 있어 구원은 오직 ‘광기’와 ‘죽음’이다. 공주가 되지 않았다면 서커스 단원이 되고 싶어했던 소녀 시씨(Sissi)의 자유로운 영혼은 ‘엄격 강인 냉정 냉철’했던 대공비에 의해 ‘슬픔 고독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엘리자벳’역의 옥주현은 초연에 이어 보다 풍부한 감정을 실어 한 여인의 일대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지난해 다소 눈에 띄지 않았던 아들 루돌프와의 관계 역시 보다 섬세하게 그려낸 점 역시 박수칠 만했다.



새로운 ‘엘리자벳’ 김소현은 천방지축 소녀에서 침실을 들쳐보는 시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내 놓는 여인, 모성애 지극한 엄마, 자유와 죽음을 갈망하는 황후까지 팔색조의 매력을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잡아갔다. 실제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김소현은 극 중 엘리자벳이 자식을 두 명이나 잃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오열로 객석의 관객까지 눈물 흘리게 만든다. 무대 위에서 동화 속 공주님 같은 우아한 모습으로 각인 돼 왔던 여배우의 연기 변신에 많은 이들이 환호를 보냈다.

박효신과 전동석의 변신에도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효신은 유연한 몸 놀림과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완성했다. 프레스콜 보다 한층 안정된 모습으로 매력을 발산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춤’에서 보여주는 댄스 실력도 수준급이다.

반면 보다 미소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전동석은 시원한 성악 발성을 뽐내며 ‘죽음’의 그림자를 예술의전당 객석 끝까지 덮는다. 댄스로 의미를 전달하기 보단 리드미컬한 손 동작과 울림 가득한 중저음으로 내리찍는 카리스마가 훌륭하다. ‘드디어 때가 왔어’란 대사의 의미가 실감 날 정도로 브릿지 위에서도 에너제틱하게 뛰어노는 젊은 악동의 모습이 새롭다.



두 죽음의 그림자의 색채가 확연히 다르다. 천천히 빠져드는 죽음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면 박효신을, 단숨에 제압당하는 죽음에 끌린다면 전동석을 추천하겠다. 또 다른 죽음 역으로 나서는 JYJ 김준수는 8월 14일 첫 공연을 앞두고 있다.

엘리자벳을 암살한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루케니’로 무대에 오른 배우 박은태 이지훈 역시 제 몫을 해 낸다. 박은태는 사이코패스와 해설자 역할을 오가며 객석을 집중시켰다. 배우 오성원(막스공작), 한지연(루도비카), 박선정(헬레네), 홍금단(에스터하지 백작부인), 이지수(라우셔 대주교), 윤승욱(그륀네 백작), 정태준(슈바첸베르크후작), 김준오(켐펜 남작), 민준호(휩너 남작), 곽동욱(라카이)의 존재감도 돋보인다.

2013 <엘리자벳>의 변화는 분명 반가웠다. 하지만 ‘죽음’의 캐릭터에 더 무게 중심이 실린 느낌이다. 또한 30번이 넘는 무대전환은 극 속에 완전한 몰입을 방해했다. 2시간 50분 동안 이중 회전무대는 어지럽게 돌아갔고, 무대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내려간다. 이번엔 <파워레인저>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찌지직’거리는 레이저 광선까지 추가됐다. ‘황후는 빛나야 해’의 넘버가 이해가 되긴 하면서도 과식한 느낌을 지우긴 힘들었다. 제작진들은 엘리자벳 황후보단 ‘죽음’이 더욱 기억에 남고, 화려한 무대에 가려 인물이 온전히 빛나지 못한 남은 과제를 다시금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EMK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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