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이 정도면 모방을 넘어선 것 아닌가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이승준 감독의 영화 <스파이>는 개봉할 때를 참 고약하게 맞추었다. 아무리 <스파이>가 국정원 주인공을 내세운 '코미디'를 내세워도 지금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코미디를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긴 현실세계의 지리멸렬함에 진저리를 친 관객들이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폼이 나는 허구의 코미디를 선택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 나로서는 굳이 국정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추석 영화로 챙겨볼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지만 선택은 자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스파이>의 시놉시스가 나온 뒤부터 꾸준히 돌았던 <트루 라이즈>와의 유사성이다. 기자간담회장에서 누군가가 "그런데 <트루 라이즈>가 무슨 영화야?"라는 소리를 얼핏 들었으니 이 영화도 벌써 옛날 영화가 되었나 보다. 하긴 1994년 영화이니 거의 20년 전이다. 90년대가 회고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걸 깜빡했다.

그러니 모를 수도 있는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해보기로 하자. 제임스 카메론의 이 영화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세일즈맨으로 행세하는 슈퍼첩보원이다. 제이미 리 커티스가 연기하는 그의 아내는 권태기에 진저리를 치다가 자기가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빅 팩스턴에게 끌리게 된다. 슈왈제네거는 이 가짜 스파이로부터 아내를 구하고 아랍 테러리스트로부터 나라를 구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카메론 자신의 것이 아니다. <트루 라이즈>는 우리나라에 <토탈 라이즈>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클로드 지디의 프랑스 코미디 액션 영화인 ‘La Totale!’의 리메이크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본 영화는 <토탈 라이즈>가 아니라 <트루 라이즈>이니, 그냥 <트루 라이즈> 이야기만 하겠다.



<스파이>와 <트루 라이즈>의 유사성은 무시하기 힘들다. 우선 설경구는 중요한 국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슈퍼 스파이다. 문소리는 그런 남편의 정체를 모르는 아내인데,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나 폼을 잡는 다니엘 헤니에게 끌리게 된다. 장면장면의 유사성도 있다. 문소리와 제이미 리 커티스는 모두 기관총을 사용한 코미디 장면이 있다. 둘 다 핵미사일과 관련된 폭발적인 액션 장면이 있다. 그 외에도 비슷비슷한 액션 장면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른 관객들이 집어낼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소리를 유혹하는 다니엘 헤니의 캐릭터가 실제 테러리스트라는 점인데, 이건 <트루 라이즈>와 달라서 오히려 튀는 부분이다.

이 영화를 제작한 JK 필름에서는 지금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모델로 내수용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해운대>, <퀵>, <7광구>같은 영화들은 모두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원본들이 있다. 단지 그 영화들의 경우 모방작들이 워낙 많아 거의 장르화되었거나 나중에 추가된 한국적인 요소들이 원본에서 가져온 재료보다 많아서, 모방작이라는 생각은 들어도 그게 심하게 불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스파이>는 그 선을 살짝 넘어선다. 한국적인 상황을 추가한다고 해도 기본 아이디어의 유사성은 여전히 눈에 밟힌다. 이 정도면 리메이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장화, 홍련>의 정식 리메이크 영화인 <안나와 알렉스>가 원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영화인지 생각해보라), 정작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말들을 들어보면 정식 리메이크는 아니란다. 하긴 그럴 수도 있다. 클로드 지디가 만든 이 가벼운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도 <투 캅스>가 (역시 클로드 지디가 만든) <마이 뉴 파트너>의 표절작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걸 생각해보면 이 유사성을 무시하는 태도는 신경 쓰인다.



<스파이>는 원래 <미스터 K>라는 제목으로 이명세가 감독하던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제작자와의 의견차이로 이명세는 해고되었고 그 자리를 <해운대>와 <퀵>의 조감독이었던 이승준이 물려받았다. 처음부터 이승준이 했다면 논리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JK 필름이 대단한 작가주의를 추구하는 곳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명세가 떠난 프로젝트'라는 건 무척 신경 쓰인다. 원래 각본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이명세와 <스파이>의 프로젝트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명세가 만들려 하던 <미스터 K>의 '촌스러움'이 <스파이>의 익숙함을 커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스파이>, <트루 라이즈>]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