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북한을 파트너로 인식하다니 기특하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스파이>는 신분을 감춘 비밀요원의 임무수행과 사생활 사이의 갈등을 그린 코믹첩보물이다. <스파이>의 설정은 <7급 공무원>이나 <트루 라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말하자면 <스파이>는 ‘판을 키운 <7급 공무원>’ 혹은 ‘한국화 된 <트루 라이즈>’ 쯤 된다. 다소 익숙한 이 설정에서 얼마나 창의적인 재미를 살리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합격점이다.

김철수(설경구)는 아내에게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최고의 수행능력을 갖춘 첩보원이다. 스튜어디스인 아내 안영희(문소리)는 걸핏하면 출장을 가는 남편 탓에 결혼 7년 차에도 아이가 없는 것이 불만인데, 시어머니가 압박을 가하자 폭발직전에 이른다. 불임 클리닉에서 임신가능 날짜로 잡아준 날에 김철수가 또다시 출장을 떠난다고 하자, 안영희는 홧김에 비행근무에 나섰다가 태국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완벽한 미남(다니엘 헤니)을 만나 모처럼 달달한 시간을 갖는다.

한편 6자 회담 재개를 앞두고 비밀리에 남한으로 향하던 북한 고위간부의 비행기가 추락하고, 그의 딸이자 핵물리학자인 백설희(한예리)가 태국에서 남한으로 망명을 요청한 가운데, 김철수는 백설희를 무사히 데려오기 위한 작전에 투입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세력의 방해에 부딪혀 작전은 꼬여만 가고, 중요한 순간마다 미남의 추파에 정신 못 차리는 마누라와 자꾸만 마주치는데...과연 김철수는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비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아내와의 사랑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 배우들의 환상의 조합이 빚어낸 코믹&액션

<스파이>가 지닌 재미는 뚜렷하다. 첫째, 배우들의 개성이 잘 살아있고, 코미디의 리듬이 좋은 편이다. 설경구, 문소리의 베테랑급 연기와 화학작용은 단연 최고이다. 설경구는 우직한 액션을 소화하는 스파이이자, 마누라와 어머니에게 시달리는 평범한 생활인의 역할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문소리의 코미디 연기도 굉장한 재미를 준다. 문소리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분노의 윤리학>에서도 깐깐하고 드세고 강한 여성을 연기했지만, 본격적인 코믹연기는 <스파이>가 처음이다. 하지만 문소리는 보통 한국 아줌마의 스타일과 욕망을 대변하는 안영희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김철수를 대하는 마누라 안영희와 다니엘 헤니 앞에서 히죽대며 내숭을 떠는 안영희가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시종 웃음이 나오는데, 총알이 빗발치는 식당에서 빨간 미니 드레스를 입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안영희의 모습은 큰 웃음을 선사한다.

모처럼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다니엘 헤니의 연기도 기대이상이다. 멋진 외모가 주는 시각적 쾌감도 상당하지만, 후반부의 반전을 통해 개성 있는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꽤 재미있다. 고창석의 간이 딱 맞는 감초연기와 라미란의 신선한 코믹연기도 볼만하다. 특히 고창석의 도마뱀 포복액션과 어디서나 나타나는 라미란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도 웃음의 포인트이다.



둘째, 액션과 서사의 규모가 상당하다. 코믹첩보물이긴 하지만, 스케일은 여타의 첩보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김철수가 테러집단과 협상을 벌이다 총격전을 벌이는 오프닝 시퀀스를 비롯해, 호텔 납치장면이나 식당 총격장면 등 태국 로케이션 장면들은 항공촬영을 비롯한 세련된 촬영기법을 통해 이국적인 풍광과 다채로운 액션을 잘 담아내었다. 또한 한국에서 찍은 자동차 추격 장면과 공중 헬기 장면도 난이도 높은 액션으로 상당한 긴박감을 보여준다.

영화의 서사 역시 스케일이 크다. 남북 합의로 통일 전 단계까지 간 한반도가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핵전쟁 위기로까지 내몰리는 상황은 실로 한반도의 명운이 달린 사태이다. 총이나 폭탄이 아니라 아예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이 등장하고,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미국이나 국제자본의 동향이 나오는 등 근본적인 갈등을 그리고 있다.



◆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기특한 영화

셋째,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북한정부를 통일의 파트너로 사고한다. <쉬리>이후 2000년대 남북긴장완화 분위기 하에서 만들어진 북한관련 국내영화들이 취하는 가장 흔한 입장은 북한정부를 대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인정하되, 이에 불만을 품은 북한의 군부강경파를 새로운 악의 축으로 상정하는 것이었다.

2008년 이후 남북 관계가 악화되자, 국내영화들은 내부균열을 겪는 북한체제의 하부집단이 일으키는 도발을 강조했다. 예컨대 <의형제><베를린><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에서 지도부의 혼선과 자중지란으로 인해 북한의 하부조직이 자체적으로 벌이는 잔인하고 무의미한 살육이 묘사됐다. 과도한 비극성과 북한 첩보원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넘쳐나는 가운데, 분단은 고정된 조건으로 인식되었고, 무력충돌은 불가피한 것으로 그려졌으며, 통일의 가능성은 요원하게 치부되었다.



하지만 <스파이>는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스파이>에서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은 북한의 강경파나 하부집단이 아니다. 영화 속 북한의 지도부는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나름대로 체제안정을 위한 경제적인 노력과 통일을 위한 다각적인 교섭을 진행 중이다. 영화는 남북 화해와 합의를 통한 평화통일의 전망을 놓치지 않는다. 한반도의 긴장고조와 전쟁위기로 이득을 볼 세력이 과연 누구일지를 질문하게 하며, 이들의 방해를 뚫고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이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천명했던 ‘7.4 남북공동성명’부터 자주적 평화통일의 원칙을 확인한 ‘6.15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남북이 합의하였던 통일에 대한 기본 입장이다.

영화 <스파이>는 북한을 궤멸해야 할 적으로 그리지도 않고, 붕괴되어 가는 체제로 그리지도 않는다. 북한은 전쟁이나 흡수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통일을 이루어나갈 파트너이다. 흔히 ‘킬링 타임용’이라고 여겨지는 코믹첩보물이 이처럼 올바른 통일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따로 칭찬할만한 가치가 있다. 나날이 악화되어가는 남북관계와 차츰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전쟁은 공멸이다. 자주적 평화통일만이 살길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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