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명배우들 모아놓고 이토록 밋밋할 수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관상>은 <연애의 목적><우아한 세계> 단 두 편으로 흥행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으며 중견감독으로 인정받는 한재림 감독의 신작이자, 송강호, 이정재, 김혜수, 백윤식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에,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조정석과 이종석의 출연으로 최고의 기대를 모은 사극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관상>은 관상에 대한 성찰이나 시대에 대한 재해석도 없는 밋밋한 사극이 되어버렸다.

역적의 자식이자 천재적인 관상가인 내경(송강호)은 오지에서 처남(조정석)과 함께 아들(이종석)을 키우며 살아간다. 한양에서 기생 연홍(김혜수)이 함께 일을 하자고 내경을 찾아오자, 늘 공부하여 관직에 오르고 싶어 하는 아들을 만류하던 내경은 아들을 놓아주고 처남과 함께 상경한다. 연홍의 기방에서 관상을 보아주던 내경은 살인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좌의정 김종서의 눈에 들게 되고, 관리임용에서 관상을 보아주는 벼슬을 얻게 된다. 그의 명성은 왕에게까지 전해져 문종은 내경에게 자신이 죽은 뒤 수양대군이 역모를 일으킬 관상인지 몰래 보라고 시키는데...

◆ 흥미로운 소재를 낭비하다

<관상>은 사람의 얼굴에 성격은 물론 운명까지 드러나 있다는 꽤나 흥미로운 관상의 세계를 소재로 삼고 있다. 영화에서 합리적인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대부들은 관상을 공공연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관리임용이나 역적을 가려낼 용도로도 활용할 만큼 관상에 대한 수요가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얼굴만 보아도 사람의 내면이나 미래를 알아내고픈 욕망이 그만큼 강한 탓이다. 관상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입사시험에서 관상가가 면접관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영화는 관상이라는 꽤 흥미로운 유사과학이자, 오래된 경험론이자, 시각매체인 영화와 썩 잘 어울리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갖고 있지는 않다. 영화가 관상에 대해 풀어놓는 철학은 ‘한사람의 관상만 보는 것은 충분치 않고, 그와 관계 맺는 사람의 관상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고, 개인적인 관상에 함몰되기보다는 시대를 함께 읽어야 한다’ 정도이다. 이정도 철학이 나쁘지는 않다. 문제는 이러한 철학이 서사를 통해 통렬하게 도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경이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도출해야 할 교훈은 따로 있다. 내경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바꿔쳐진 수양대군의 얼굴을 수양대군으로 오인했다는 점이다. 천재적인 관상가인 내경이 아무리 고의적인 속임이 있었다한들, 왕족인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문종과 안평대군의 얼굴까지 본 상태에서 그가 형제인지 아닌지도 못 알아봤다는 것은 일반사람의 눈보다도 못한 것이다. 이것은 시나리오 상의 허점이라고 할 만한데, 영화는 이에 대해 수긍할만한 설명을 갖고 있지 않다.

내경이 저지른 두 번째 실수는 그가 축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양대군의 이마에 점을 찍음으로써 오히려 그가 역적이 되게끔 한 것이다. 관상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관상학의 대전제를 믿는 관상가라면, 얼굴에 점을 만드는 행위가 단순히 왕의 경각심을 높이는 것 이상의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어야 한다. 영화의 서사는 ‘어떤 운명을 막기 위한 행동이 바로 그 운명의 일부로 작용하여 운명을 실현시키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이 아이러니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비롯해 이솝우화, 일본설화 등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운명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영화도 내경도 이 아이러니를 깊이 숙고하지 않는다. 내경은 자신이 수양의 관상에 화룡점정을 하여 역적의 운명을 완성시켰다는 회한에 젖지도 않는다. 영화 역시 이 아이러니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이 아이러니가 제대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수양이 흔들리는 존재였어야 한다. 수양이 역모를 일으킬지 아닐지 수양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경의 화룡점정이 고뇌하던 수양을 역모를 일으키는 쪽으로 급선회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어야 한다.



영화는 그러나 처음부터 수양을 거들먹거리는 악인으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왕만 눈치를 못 채고 있을 뿐이지 수양이 역모를 일으키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이 상태에서 화룡점정은 별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관객들은 사후적으로 수양이 역모를 일으킬 것을 안다. 그러나 사극에서 그 순간은 아직 유동적인 현재이다. 과거의 사실은 역사에 의해 고정되어 있지만, 그 과거의 순간을 잡아 늘려 확정되지 않는 현재로 사유하며 반추하는 것이 사극이다. 그러나 <관상>은 역사적 사건을 소비하였을 뿐 역사를 반추하는 의미를 살리지 못했다.

◆ 시대에 대한 재해석도 없는 사극이라니!

<관상>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는 계유정란을 다룬다. 그런데 왜 계유정란인가에 대한 질문이 없다. 다시 말해 지금 계유정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하는 것이 빠져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이후 80년대 초까지 수양은 역적이었고, 김종서와 사육신은 충신이었다. 84년 문화방송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설중매>를 통해 한명회라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부각되면서, 권신들에 의해 둘러싸인 어린 단종의 왕위유지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양의 왕위찬탈 중에서 무엇이 더 나쁜지를 묻는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방영 당시 정통성 없이 집권하여 강력한 독재를 펼쳤던 5공화국 세력에 대한 유리한 역사해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찌됐든 충(忠)이라는 유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왕권이라는 권력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조명한 신선한 시도였다. 1993년에 출간된 소설 <영원한 제국>은 조선의 역사를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읽으며 왕권을 신권의 우위에 두는 입장에서 강력한 개혁군주를 갈망하는 역사관을 피력했다.



이후 정조, 광해군, 소현 세자, 중종, 심지어 고종 등을 재조명하며 개혁군주에 대한 열망을 이어나갔다. 드라마 <선덕여왕>(2009)도 그 자장에 속하는 텍스트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2011)는 왕권과 신권에 대한 사유를 근본적으로 다시 감행한 텍스트이다. 조선은 건국이념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왕권의 나라가 아니라 신권의 나라였으며, 그것이 왕의 독단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합리적인 통치라는 점에서 더 진보적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은 왕권과 신권 사이의 긴장과 갈등과 고뇌를 한 몸에 끌어안고 견디며 싸우며 분열하는 왕이었다.

다시 <관상>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는 수양대군은 만고의 역적이고, 김종서는 만고의 충신이라는 믿음에 일말의 의심도 제기하지 않는다. 김종서가 인사에 대한 전권을 쥐고 어린 왕을 보필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영화는 질문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흥미로운 장면들이 잠깐씩 등장한다. 첫째는 바른 관리가 되어 백성에게 봉사하며 역적이었던 할아버지의 과오를 씻겠다는 진형(이종석)이 김종서의 인사전횡에 이의를 제기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는 곧바로 김종서 일파로 가장하여 진형을 괴롭히는 수양 일파를 보여줌으로써, 수양에 대한 악마화를 이어간다. 김종서는 어떠한 권력에 대한 사심도 없이 단종을 보필하는 신하였을까. 그렇게 해서 지키고픈 아니 지켜야만 하는 단종의 왕위는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니는 걸까.



두 번째로 잠깐 흥미 있는 장면은 역적의 얼굴을 본적이 없다는 내경에게 문종이 이방원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종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이방원을 역적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잠시 혼란을 느낀다. 유교적인 충(忠)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계유정란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역적이라면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차지한 이방원도 당연히 역적이다.

그러나 문종도 영화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곤혹해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태종으로부터 이어져온 현재의 왕위를 지켜야 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는 더 본원적인 질문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 질문은 던져지지도 못하고 폐기되고 만다. 그 질문은 바로 ‘그렇다면 문종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성계는 역적인가?’이다. 이는 조선이라는 왕조자체의 정통성을 묻는 질문이다.



사실 문종 때인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조선은 왕조의 모든 것이 다 완비되지 못한 상태로, 조선왕조의 개국자체를 의문시하는 질문도 충분히 사유될 만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 질문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낡은 가치로 회귀하여 시대를 복기하기 시작한다. 이제 남은 것은 신파뿐이다. 수양은 포악한 역적이고, 계유정란은 잔혹한 유혈참극이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진형이라는 것이다.

결국 <관상>은 관상에 대해서나 시대에 대해서나 어떠한 재의미화도 없이 초반에는 송강호-조정석 콤비코미디와 김혜수의 미모로 적당한 즐거움을 주다가, 막판에는 한없이 늘어지는 신파로 긴 런닝 타임을 채우는 진부한 사극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배우의 낭비가 실로 막심하다. 모든 배우가 기존의 이미지를 소모적으로 사용하는데 소비되었다. 한재림이라는 감독의 개성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관상>은 소재도 시대도 배우도 감독도 낭비된 희귀한 사례로 손꼽힐만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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