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영화와 역사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한재림 감독의 신작 영화 <관상>을 보고 있으면 문득, 그리고 새삼스럽게, 작금의 한국영화가 흥행 면에서 이처럼 성공하고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얘기에 눈과 귀가 쏠리지 않겠는가.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영화가 드라마틱하기 이전에 현실과 과거 자체가 그 이상으로 드라마틱한 사회다. 실제 이야기가 드라마틱한데 거기다 또 허구의 드라마틱한 느낌을 더했으니 그 어떤 영화가 이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렇다. 조선조의 숱한 궁중 쿠데타와 역쿠데타의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그 어떤 사건보다도 역동적이다. 피와 살이 튀긴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 친족과 친족 간에 도륙을 낸다. 재밌는 것은 그때의 이야기가 이상하게도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일종의 통시성(通時性)이다.

<관상>은 조선조의, 비교적 건국 초기 상황의 이야기를 그린다. 500년의 위용을 자랑하는 조선조는 27명의 임금이 집권했으며 그 중 7대인 세조 때까지를 우리는 보통 건국 초기로 분류한다. 태조 이성계가 쿠데타로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연 후 세조 때까지 조선의 세상은 그야말로 피바다였다. 3대인 태종 곧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밀어 내며 정권을 수호한다. 하지만 늘 정정은 불안했고 왕권과 신권은 대립을 거듭했다. 세조는 태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세종의 둘째 아들로 선대의 공신인 김종서에 맞서 권력의 철저한 중앙집중화를 꾀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형인 문종이 죽자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는 쿠데타를 감행해 정권을 잡는다.

영화 <관상>은 바로 이 시기, 그러니까 문종(김태우)이 병으로 죽고 단종(채상우)이 즉위한 직후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정재)과 김종서 장군(백윤식)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과정을 다룬다. 흔히들 계유정난으로 부르는 그것이다. 계유년인 1453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여기에 수양대군 측 책사이자 모사꾼인 한명회(김의성)와 김종서 측 사람으로서 관상쟁이인 김내경(송강호)과 그의 처남(조정석), 그리고 그의 아들 진형(이종석)의 얘기를 씨줄낱줄처럼 얽혀서 진행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관상쟁이인 김내경이다. 역적의 후손으로 산골에서 숨죽여 지내던 내경이 한양의 유명한 기생이자 사이비 관상쟁이인 연홍(김혜수)의 손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얼굴을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과거와 미래를 밝혀 내는 신통방통한 내경의 능력은 곧장 입소문을 탄다. 그에 대한 얘기는 결국 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내경은 죽어가는 임금으로부터 김종서를 도와 종묘사직을 지키라는 명을 받게 된다. 당연히 수양대군 측으로부터는 살벌한 위협과 견제에 시달리게 된다. 양측간의 권력싸움은 절정의 순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내경은 그를 찾아 온 한명회에게 참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흐름을 봤어야 했소. 바람을 봤어야 했단 말이지. 그런데 너울대는 파도만 봤으니..” 격동과 격랑의 시대에 사람들은 선 하나의 차이를 두고 충신과 간신이 된다. 선을 넘으면 참혹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고 선을 넘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긴 해도 잔인한 여생의 후회가 기다리고 있다. 선 저쪽이나 선 이쪽이나 어느 하나 편한 곳이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사람들의 선택을 강요하며 생과 사를 위한 인간의 실존적 선택에는 늘 위험과 원친 않는 결과가 따른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그 선택엔 항상 허점이 따르기 마련이다.



주인공 내경은 김종서의 편에 서지만,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지만, 결정적으로 판을 읽어 내는 데는 실패한 셈이 됐다. 역사는 승리한 자만을 위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어간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법이다. 그건 꼭 승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다 그렇지만 세조의 쿠데타 역시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주인공 이름이 ‘내경’인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내경. 아마도 ‘內鏡’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마음 속의 거울. 진정한 관상은 얼굴의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주인공 내경이 수양대군의 역모에서 보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속내일지도 모른다.

<관상>을 만든 한재림 감독도 마찬가지다.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역사적으로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비판해야 하는 것인가. 영화 속에서 수양대군은 한 여자 점술가를 처치하기 전에 광기어린 눈빛으로 칼을 들이대며 이렇게 절규한다. “언제부터 조선의 왕가가 이씨가 아니라 김씨가 됐단 말이더냐?!” 왕권과 신권. 대통령과 국회. 권력과 민중. 한재림 감독은 배우 이정재의 입을 빌어, 어떤 정치적 주장을 하기 보다는 역사엔 늘 양쪽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다. 영리한 선택이지만 화끈한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선택과 판단과 판결을 내리는 행위가 아니다. 그 단어들 사이의 다이너미즘을 추출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상>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며 한국영화의 사극 장르가 또 다른 경지의 획을 그으며 한 단계 올라서고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무엇보다 한재림은 전작인 <우아한 세계>에 이어 현대극과 역사극을 오가는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내는데 성공했다.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모두 장원급제 급으로 일품이다. 송강호의 연기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의 서브 텍스트 역할을 맡았던 처남 역의 조정석은 언제나 발군의 느낌을 준다. 수양대군 역의 이정재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지금 그는 명백히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카리스마에 관한 한 김종서 역의 백윤식을 따라갈 배우가 없다. 김혜수는 여전히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한국의 몇 안 되는 진짜 여배우다.

영화를 통해 역사의 피맛을 느끼게 되는 건 여러 의미로 시대적 각성의 순간을 경험케 한다. 한번 그 맛을 느끼게 되면 영화도, 역사도 쉽게 버릴 수 없게 된다. 영화와 역사는 늘 유의미한 관계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관상>은 500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전율케 한다. 그 짜릿함만으로도 <관상>은 봐야 할 가치를 부여받는다. 몰역사적 가치관, 그 의식은 때론 영화를 폄하시킨다. 둘의 수레를 같이 굴려서 봐야 한다는 얘기는 바로 그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사진=영화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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